I L운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바뀌어야 될 내일의 I L패러다임. 연구 발제자 : 제9기 김성진. 1. I L 운동의 어제. 우선 나는, I L운동의 어제를 말하기 전에, I L운동의 모태가 되었다고 하는 미국의 시민권운동이 어떤 사상과 이념을 그 밑바탕에 깔고 시작되었는지에 대해 짚어보려 한다. (이 부분을 짚어보기 전에, 나는 현실안주와 자기들의 기득권만을 지키려고 물불 안 가리는 돼먹지 못한 거짓 보수도 아니고, 자신의 정치적 권력쟁취와 돈이 목적이면서, 겉으로는 남을 위하는 척, 자유와 평등과 연대와 인권과 휴머니즘과 박애라는 그럴듯한 고급 어휘들로 포장된 플라톤과 니체의 철학을 앞세운 허울적 진보도 아님을 밝혀 놓는다.) 1972년, I L의 창시자로 불리는 ‘에드 로버츠’가 장애인 자립생활 운동과 함께 버클리 I L 센터를 개설하게 되는데, 겉 표면적으로 들여다보면, 이 자립생활 운동은 당시 미국의 여성운동과 각종 시민권운동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보이고, 또 한국 장애인계 쪽에선 그렇게만 알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I L운동의 모델은 여성운동과 시민권운동이라고는 말하면서도 정작 60~70년대의 미국과 유럽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으로 여성운동과 시민권운동이 무엇을 모델로 삼았고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지에 대해서는 모두 언급을 피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그 모델로의 변화가 곧 I L이념인데도 말이다. 왜들 언급을 피하고 있고, 왜 장애인이 아닌 일반 비장애인들 앞에선 I L이념에 대해서 전혀 언급을 안하는 것일까? 나 개인적 경험을 통해 그 이유를 말하면, 사회복지 이론에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장애인복지 그 중에 I L이념은 현재 많은 이들에게 각종 이권을 낳게 하는 복지의 산물인데, 이 I L이념의 모토가 특정 정치 이념과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겉으로 표면화 할 수 없어서가 아닐까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60~70년대 미국과 유럽의 여성운동과 시민권운동이 모토로 삼고 다른 주장과 다른 양상으로 변화된 주요인은 바로 1968년 5월에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그러나 실패로 끝난 68혁명이 그 요인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68혁명이란 무엇인가.??? 이 혁명이 일어났던 당시 프랑스 내부의 정치/사회/문화적 요인은 다양하지만, 1960년대 당시 유럽에 각 국가들과 사회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져서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국민들 모두를 감시의 대상으로 전략시켜놓고 통제를 했던 사회였다. 자본주의 국가들에선 개인에 중요성보다 국가에 발전과 그 중요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국민들을 위한 복지는 등안시하고 있었고, 그 결과 국민들의 불만은 누적 될 때로 누적 되어 있던 상태였다. 각 계층 간의 격차로 인한 골은 깊어지고, 모순을 보이고 있던 전통적 권위와 윤리 의식은 세대를 따라가지 못함으로 이것들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했고 자본주의 사상의 모순적 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이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이 1966년에 일어난 중국 문화혁명의 주체적 이론인 ‘마오이즘’이다. 당시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막스-레닌주의로 변혁을 꿈꾸던 유럽 사회주의자들 쪽에서도 폭력정치인 막스-레닌주의로는 이상적 사회주의국가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하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1966년에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혁명을 보면서, '이상적 사회주의국가를 만들려면 정치와 사회구조 그리고 경제구조를 바꾸기 이전에 각 개인의 의식과 생각, 또한 전통적 사상과 가치관의 모든 문화를 개조시키고 의식화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이, 마르크시즘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결합시킨 빌헬름 라이히의 '성정치' 이론이다. 이 이론의 핵심 골자는, 성(性)의 해방 곧 남녀로 갈라놓는 성에 대한 고유 역할을 깨버리고 없애자는 주장을 통해, 모든 전통적 종교와 관습의 가치관과 모든 도덕과 모든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고, 그것들을 해체해서 개인의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68혁명 당시 학생과 노동자들이 들고 나왔던 구호와 캐치플레이는 “모든 권위와 억압에 저항하라.”이었다. 그런데 이 구호는 바로 문화혁명의 주체 이론인 ‘마오이즘’에 구호와 같은 구호였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68혁명은 학생운동이다. 68혁명 당시 이 학생운동은 프랑스 파리, 독일 프랑크부르크, 미국 뉴욕-버클리-시카고, 멕시코시티 심지어 가까운 동경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일이다. 여기서 우리 장애인계에서 주목할 일은, 68년 당시 버클리 대학에 누가 있었는가? I L의 창시자 에드 로버츠이다. 그러면 이 사람이 그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왜냐면, 중국 문화혁명 이후 ‘마오이즘’에 의해 변화된 신마르크스주의가 말하고 있는 빈곤(貧困)에 대한 ‘원인과 책임’의 대상을 지목하는 전개 논리와, I L이념의 한 부분인 장애인 복지학에서 말하고 있는 장애에 대한 ‘원인과 책임’의 대상을 지목하는 전개 논리가 같기 때문이다. 즉, 양쪽 다 그 ‘원인과 책임’은 국가와 사회의 것으로 돌리는 논리를 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85년에 출간된 장애인활동가 세이케 카츠오가 쓴 ‘미국에서의 일 년’과 그가 1991년의 정리한 글에서 에드 로버츠와의 대화를 적고 있는데 로버츠는 이런 말을 한다. “모든 사람은 장애를 갖게 되면 적절한 의료처치를 받고 알맞은 재활훈련과 지역사회 안에 어울리고 자립생활을 누릴 권리를 얻어야 한다. 누구든지 그렇게 믿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인 요구는 단지 정부만이 완수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면 과연, 에드 로버츠의 저 말이, 자본주의 교육에서 나온 말인가.? 아니면 흑인운동에서 배워서 하는 말인가.? 그도 아니면, 신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온 말인가.? 68형명 당시 버클리대 학생들은 자유로운 사상 토론을 할 수 있는 모임을 만들 수 있게 해달라고 시위를 했었고, 그 결과 얻어낸 토론 모임에 에드 로버츠도 참여를 해서 자기주장을 말했었다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인데, 에드 로버츠가 저 68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부분들을 지적해서 말하는 이유는, I L이념 자체를 비판하기 위함도, 사상적 비판을 하기 위함도 아니다. 초기에 I L운동 전개 당시 정치적, 사상적, 사회적 배경은 다 빼놓고, 표면적 과정과 결과만을 말함으로 사상에 대한 선택권은 박탈하고, 어느 특정 집단의 이권을 위해, 장애인들을 의식화해서 자기들 이권 도구로 이용하려 드는 것을 보고 있기에 이 부분을 지적하는 것이다. I L이념의 핵심 중에 한 부분은 누가 뭐래도 자기선택(결정)권이고, 이 이념을 밑바탕으로 동료상담가에 역할 중에 하나인 정확한 정보 제공들을 통해, 당사자가 그 정보들을 선별해 선택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정치 이념과 사상도 인간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권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만약, 장애라는 같은 조건과 경험을 갖고 있다 해서 그 경험에 대한 개인의 판단과 해석도 같을 것이기에, 이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식으로 한쪽으로 몰아붙이고 의식화 하려든다면, 자기선택(결정)권을 말하고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라고 말하는 I L이념에 배치되고 모순이기에 결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장애인 각 개인이 속한 환경적 상황과 가족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인격과 태도가 다 다르기에, 경험도 다를 것이고, 그 경험에 대한 판단과 해석, 감정과 느낌도 전부 다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체 장애인은 불평등과 불이익에 대상이기에 다 분노에 감정을 소유했고, 그 느낌과 감정이 진짜라고 호도하고 분노를 갖도록 유도해서 전체를 공통화 시켜놓고, 어떤 배경에 사상에서 나온 이념인지 전혀 의식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거기에 “내 편을 들어주니 좋은 것”이란 식으로, 그 해결을 위한 방법은 이것이라고, 특정 정치 이념과 사상을 주입하고 의식화로 몰고 가서야 되겠는가? 그것도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이권을 위해서 말이다. 2. I L 운동의 오늘. 미국에서 시작된 I L운동은 장애에 대한 ‘원인과 책임’의 대상을 국가와 사회라고 논리를 전개해 놓고, 국가에서 주는 돈과 각종 서비스와 혜택만을 요구해왔고, 그저 기대기만 하고, 기다리는 국가/사회 의존적 운동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한국 장애인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우리 장애인계 쪽에서 벌려왔던 모든 운동은, 누군가에 말처럼 솔직히 먹고 살기 위한 소비적 운동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대다수 일반인들은 ‘복지는 소비다.’ 라고 말하고들 있는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로.. I L운동의 기본 목적은 분명코, 장애인들로 하여금 모든 전문가 집단과 통제와 관리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주체적 삶을 영위(營爲)하며 살도록 돕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 I L센터들은 이 기능을 못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단지 정부에 밉보이지 않고 지원금이나 받고, 정부 감사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돈 관리만 하고, 정부 규정에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천편일륜적 서비스만을 제공하고 있고, 모든 전문가 집단과 통제와 관리 집단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줘야 할 센터들이 오히려 전문가 집단이 되어서 활동보조인을 통해 통제와 관리를 하는 집단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인식조차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서, 전동휠체어만 타면 지하철과 기차로 어디든 혼자 다닐 수 있는 장애인에게 활동보조인 대동 없이는 혼자 다니지 말라고 한다. 자기들 활동지원계약서의 규정이라면서 말이다. 왜? 사고가 생기면 정부로부터 부정수급이라는 관리 책임을 물어오기 때문에, 그 책임을 지기 싫다 이거다.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 센터의 개설 목적은 무엇인가.? 장애인을 위해선가.? 아니면 장애인들을 이용한 돈벌이 수단인가.? 이건 솔직히 이름만 I L센터이지 행동범위만 넓어진 울타리 없는 수용시설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혼자 다니려면 결제 끝내놓고 다녀라.”라고, 그런데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센터들에서 계약할 때 활동보조 사용시간부터 미리 정해서, 여유 시간도 없이 쫙쫙 갈라서 한 달에 얼마라고 월급처럼 정해 버리고, 보조인들은 정해진 시간이상 급여가 안 들어오면 태도부터 달라지는데, 심리적으로 그 불편함을 어찌 견디겠는가.? 더욱이 거동이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사는 나 같은 사람은 보조인이 나를 케어 하는 것보다 어머니를 케어 하는 일이 더 많은데, 결제를 끝내놓고 혼자 다닐 수 있을까.? 차라리 속편하게 집안에 죽치고 있는 수밖에 없다 이 말이다. 즉, 센터들은 자기들 이권 때문에 I L의 이념을 따르지 않고 있고, 불합리한 규정을 정해놓은 정부와도 싸우지 않고, 자기들 스스로 장애인들을 통제 관리를 하는 집단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센터들의 저런 행위는 장애인 서비스 국제 표준에 분명히 어긋나는 짓이다. 여기서 국제 표준을 따르고 있는 호주에서 시행중인 장애인 서비스 표준 권리를 보겠다. 표준 1: 권리 이 표준의 의도는 법적인 요건을 충족하고 장애인을 위해 긍정적인 결과를 성취하는 윤리적이고 안전하며 이용자를 존중하는 서비스 전달을 장려하는 것이다. 인권 원칙은 모든 표준에 적용되며, 각 표준은 기본권 성취를 지원한다. 이 표준은 자기결단, 선택, 사생활 및 비차별 등과 같은 특정 권리들에 중점을 둔다. 이 표준은 인간의 내재적인 권리인 표현의 자유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다. 이 표준은 장애인들이 근본적으로 존엄성을 인정받고 존중받을 권리를 강화한다. 여기에는 위험 존중, 즉 삶에서 다소의 위험 감수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다. 이 표준은 일부 장애인들이 서비스나 지원을 이용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손해, 방임, 학대 혹은 폭력의 위험을 인정한다. 이 표준은 이러한 위험을 줄이는 데 있어서 서비스와 지원, 가족, 친구, 보호자 및 옹호자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표준은 개인의 권리 그리고 개인과 서비스의 책임을 증진한다. 이것이 장애인 서비스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국제 표준 권리이다. 과연 관리와 통제만을 하려드는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인가.? 무늬만 자본주의인 국가인가.? 또한 이 한국에 I L센터들은 저 서비스 권리를 따르고 있는가.? 모두에게 묻고 싶다. 3. I L 운동의 내일. 위에서 나는, 미국에서 시작 된 I L운동에 대해. 국가/사회 의존적 운동이라 말했다. 그런데 과연 미국의 IL패러다임이 현재도 초기에 의존적 패러다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까.? 아니, 아니다. 현재 미국의 I L패러다임은 국가/사회에 의존성을 벗어났다. 즉, 내가 필요한 것은 나 스스로 연구하고 찾아서 개발을 하고, 그 개발된 것들을 서로가 나누고 사회에 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해 사회주의적 소비의 복지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의 복지로 전환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국가의 지원이 있어서 다방면으로 누적된 자원을 활용 했기에 가능했겠지만, 그러나 I L센터들과 당사자들의 의지적 결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복지서비스는 이용자만 위한 것이 아니다. 이용자의 가족과 주변인들의 경제적 심리적 부담감을 어느 정도 덜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에, 복지서비스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장기적으로 바라보면, 이용자의 가족과 주변인들에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해서 생산성을 높여주므로, 복지서비스는 소비가 아니라 투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복지서비스를 말할 때, 반드시 이 부분을 강조하고 부각시켜서 말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낸 세금이 다시 복지 서비스가 돼서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국에 I L운동도 더 이상 요구만하는 국가/사회 의존적 운동이 아니라, 그리고 내 이권만을 내세우는 운동이 아니라, 진정, 다른 이들을 위한 자립을 지향하는 운동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참으로 장애인이 사회에 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