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그것은, 자기 신념인가. 그 말씀의 믿음직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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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그것은, 자기 신념인가. 그 말씀의 믿음직함인가.
Level 10   조회수 313
2021-07-15 13:40:47
예수의 사랑안에 있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안녕하세요  "예수의 작은 친구들"의, 요나단 김성진입니다...
듣고계신 음성은, 집필자인 제가 언어 장애가 있는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는 상황이므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글자를 읽어주는 '바라볼카' 라는 TTS 음성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추출 녹음한 음성이며,
본문과, 녹음된 파일 내용의 저작권은, 저어 요나단 김성진에게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 소프트웨어의 특성상, 정확한 발음을 표현하기 위해, 소리나는대로 적은 부분도 있음을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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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그것은, 자기 신념인가. 그 말씀의 믿음직함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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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상고 말씀...
<voice required="Name=Junwoo">
[한글 권위역 KJV 성경, 요한복음 1장 1절~14절..]
(1) 맨 처음에 [말씀]께서 계셨다. 그리고 [말씀]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리고 [말씀]께서는 [하나님]이셨다.
(2) 바로 그분께서 맨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만들어진 어떤 것도 그분 없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다.
(5) 그리고 그 빛이 어둠 안으로 비친다. 그러나 어둠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6) [하나님]께서 보내신 한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바로 그가 그 [빛]을 증거하기 위하여 증인으로 왔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었다.
(8) 그는 그 [빛]이 아니었고, 그 [빛]을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였다.
(9) 그 [빛]께서는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 하나 하나를 비추는 참 [빛]이셨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세상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11) 그분께서 그분 자신의 나라에 오셨으나, 그분 자신의 백성이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러나 그분께서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에게,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능을 주셨다.
(13) 왜냐하면 그들은 혈통에 의해서나, 육신의 뜻에 의해서나, 사람의 뜻에 의하여 태어나지 않았고, [하나님]에 의하여 태어났기 때문이다.
(14) 그리고 그 [말씀]께서 육신이 되셨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 곧 [아버지]에 의하여 유일하게 태어나신 분으로서의 영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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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금 이 글은, 서두만 종전에 쓴 글과 비슷할 뿐, 성경을 통해 완전히 다른 시각과 관점을 통해 집필 되었음을 밝혀 놓는다...

대부분 믿음을 말하는 목회자들은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또는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의 대속의 사건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믿음을 말하면서 인간의 의지를 통한 관념적 신뢰와 신념을 강조하고, 그래서 믿음이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크다 작다, 등등으로 기준과 척도로 세워놓고, 마치, 믿음은 개인의 공로와 공적인듯, 방법론적 트릭과 심리적 자세를 강조하는 것들을 본다.
분명히 맞는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모두 함께 생각해야 할 것은, 저러한 인간의 타락의 근본 속성인 자기애적 판단과 기준의 철학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자기 신념에 의한 거짓된 믿음이 아니라, 성경은 도대체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을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는가이다.

즉, 타락의 시발점이자 심판의 이유인 자기애(自愛)의 거짓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으로 인해, 참과 진리이신, 하나님 예수께서, 자신의 참과, 진리와, 의이를 버리고, 부인하고, 사람이 되어 죽으신 사건. 그 사건 자체만을 자기 자신을 위해, 내게서 표출된 의지적 신념의 인정을 통해, 스스로 소유한 신뢰와 지식화, 관념화, 습관화, 의무화 된 신념이 믿음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사건 자체만을 의미를 두고 그것만 강조하고 믿으라 하기에 삶과 생각과 의식에 아무 변화도 거듭남도 없이 아무렇게나 삶을 살아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사는 이들을 만들어내고,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그 대속의 사건 자체를 믿는것을 놓고서 믿음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 사건 자체는 사탄과 마귀들도 믿고 두려워 떨기 때문이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나와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대속의 사건을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그 사랑을 받아드리기 위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을 끝까지 유지하고, 그 자기 죽음을 통해, 나와 우리안에 내재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그 믿음이시고, 또한 바로 그 예수님이 나와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그 믿음이시기 때문이다.

왜냐면, 성경적 믿음은 우리에게 들려지고 있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고, 그 말씀이 곧 예수이시기 때문이며, 예수께서 선택하신 그 대속의 사건이 곧,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며, 자기 죽음이기에, 우리도 그와 똑같은 선택을 하고, 그 믿음이신 예수가 나와 우리안에 내재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우리의 믿음의 의에 시작점으로 삼아주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나와 우리 자신에게 반드시 물어야만하는 한가지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의 그 선택은 과연, 최종결과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으로 하나님앞에 나타나야 하는가."이다. 그 선택에 대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하나님앞에 나타나야 할까.
만약,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의 선택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자기 자신'인가..
또한, 우리의 그 선택에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과연 이것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의 그리스도 예수를 닮은 삶이고, 또한 이러한 선택의 이유를 가진 나와 우리안에, 우리를 위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을 선택하신 예수께서 내재하실 수 있을까..

우리가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할 사실은, 예수의 그 대속의 사건 자체만을 관념적으로 내 의지를 통해, 신뢰하고 신념하는 그것을 믿음이라 여긴다면, 그 믿음은 바리세인의 "율법의 행위"와 같이 자기 공로와 공적이 되어버리기에 거짓 믿음이고, 진정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믿음은 관념적 신뢰나 신념이 아닌,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을 통해, 내 안에 내재하시는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내게서 스스로 표출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결코 자기 자랑이 되어선 안된다..

자아, 그럼 여기서,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언급했기에, 오늘의 주제와 연관지어서,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라는 말과, "믿음의 의"라는 말의 뜻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여태껏, 번역된 성경만을 읽고,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개념을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개인이 자생시켜 표출하는, 즉, 그 분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역사하심에 대해 믿어드리는 관념화, 습관화, 의식화된, 내 신념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믿음이라 국한시키려 해왔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고, 의롭다 여김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개인에게서 자생되어져 표출하는 신념의 믿음을 강조해 왔다. 그것도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한번 생각해 보자.. 과연,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믿음에 대한 개념이 개인들의 신념만을 말하는 것이 맞다면, 신념이라 부르는 그 '믿음'이 예수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일까.. 아니, 아니다.. 유대인들에게도 신념이라 부르는 그 '믿음'이 있다. 그럼 어떤 모양의 믿음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들은 선택된 민족이기에, 율법이 주어졌고, 자신들의 우월성을 표출하기 위해, 또, 사(死)후에 상급을 받으려면 그것을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의 믿음이다.

자아, 나의 이 말을 듣는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예수님께 대한 우리들의 이 믿음과, 유대인들의 그 믿음은 서로 의미가 다르고, 서로 상충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저 두 가지 믿음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나, 서로 상충된 부분을 말하고 지적하기 전에, 저 두 가지 믿음은 다, 인간인 내게서 나와서 표출된 신념을 믿음이라고 공통된 착각들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고, 저러한 인간의 신념에 의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적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무엇임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신념에 의한 믿음을 소유한 이들의 공통적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 공통적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다.

신약 마태복음 6장과 7장, 즉, 산상수훈과 4복음서 전체를 통해, 위선자들이요, 외식하는 자들인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의 율법을 행하는 모습들을 놓고, 예수께서 이들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뭐라 말씀하시는가..

<voice required="Name=Junwoo">
[KJV 한글 권위역.. 신약 마태복음 6장 1절~4절..]
(1)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구제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로부터 보상을 받지 못한다.
(2) 그러므로 너는 구제할 때에, 위선자들이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처럼, 네 앞으로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이미 받았다.
(3) 반대로 너는 구제할 때에, 네 왼손으로 하여금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모르게 하라.
(4) 그렇게 해서 너의 구제하는 일이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라. 그렇게 할 때에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친히 네게 반드시 드러나게 갚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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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보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또,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얻으려고".. 과연 누구를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저들의 율법을 지키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인가..

자신은 율법에 대해 완전하다는 것을 겉으로 표출해서, 공로화, 공적화 된 우월성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사람들로부터 유도해내고 그것을 통해 칭송을 받고, 도덕적 자랑과 도덕적 향락을 즐기기 위해, 율법을 행하려드는 모습.. 바로 저런 모습이, 예수님에게 ‘사탄의 새끼들’ 이라는 가장 독한 욕을 들었던, 바리세인들과 서기관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행위인 것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 바로 저러한 행위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율법의 행위'라는 말의 의미이고, 예수님으로 인해 폐해진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하는 '율법의 행위'라는 말이다. 다시말해, 율법 자체가 그 가치와 필요성을 상실했다는 말이 아니다.

율법의 진짜 목적은 예수께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으로 온전하게 이루심으로 율법을 행하는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며, 그 목적은 상대를 위한 사랑임을 보여주셨고, 자기 자신을 위해 행하려고하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율법의 행위'가 폐해졌다는 이 말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같은 로마서 13장에서, 율법의 진짜 목적이 무엇임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 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들, 로마서 13장의 저 구절을, 율법을 지키고, 이루어내는 심리적 자세와 방법쯤으로 설명하려고 들고 있고, 그런쪽으로 몰고가려 한다. 허나, 로마서 13장의 저 구절은, 결코 사랑을 율법을 위한 도구나 방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율법의 진정한 목적은, 오직 상대를 위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아니면, 율법의 행위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바로 이 관점으로, "네 왼손으로 하여금,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 또한, 그져 단순히 '떠벌리지 말고 조용히 남들 모르게 하라'는 뜻만 담긴게 아니라, 1절과 2절의 문맥을 통해 바라보면, '너 자신을 위해 행하지 말고, 진정 상대를 위해서 행하라'는 뜻이, 더 강하게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을 깊이 읽으면 읽을수록, 성령을 통해, 깨닫게 되고 알게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율법에는, 크게 지속적 목적과, 일시적 목적으로 나누어서, 바라보고 묵상해야 하는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첫째. 율법의 근본적 속성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 속성에 발견이다.
둘째. 하나님과 인간의 근본적 속성을 통해, 율법의 지속적 목적과 일시적 목적에 대한 발견이다.
셋째. 율법의 지속적 목적과 일시적 목적을 통해, 인간 실존의 현주소와, 예수에 대한 발견이다.
넷째.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그 본체에 발견과, 모든 인간이 회복해야하는 그 형상에 발견이다.

다시말해, 율법의 진정한 목적은, 그것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에게 도덕적 수양과 덕을 쌓게하여, 그 공로와 공적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의와 자랑꺼리로 삼게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한, 그를 위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하시려는 목적인 것이다. 이 목적은 영원히 유지되고, 이루어져야 하는 지속적 목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지속적 목적과는 전혀 다른, 종이의 반대쪽과 같은 상반된 일시적인 목적이 있다.
그것은 곧, 저 율법 자체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해, 인간에게서 스스로 발생되어진 법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법이고, 저 법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는 것은, 온전한 사랑에 원리의, 저 법 자체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발생되거나 행해질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전혀 없는 타락에 증거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만약 타락의 속성인 자기애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이 자기 의지와 힘으로 저 율법을 수행하려 한다면, 그 첫번째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그 행위를 자기 자신의 공로와 공적이라 여겨,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의로 삼아서, 구원의 조건이라 내세울 수 밖에 없기에, 율법의 진정한 목적을 이룬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그 모든 것 자체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죄, 그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 말이다.

바로 이 관점으로, 사도바울이 말한, '율법의 목적은 죄를 알게 하는 것,' 이란 말에 뜻과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즉, 바울의 저 말은, 그져 단순히 저 율법의 조항들을 내가 행할 수 없기에, 자신의 죄를 알게하는 목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율법을 온전히 지켰지만, 나중에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면,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으로 들어나기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행했다 하더라도 의인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율법을 이용했던 그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행위 자체가 '신실함'이 없는 죄라는 것을 알게하는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또한, 로마서 7장 21절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내가 선을 행하기 원할 때에, 악이 나와 함께 있다"라고 말한 부분도 위에 관점으로 설명되어져야 똑바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바울의 저 말을 설명함에 있어, 전체 문맥은 생각하지도 않고, '우리안에 선과 악이 서로 공존하고 있고, 대립 관계를 이루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는 식으로 설명하려고 든다.

그러나, 18절을 보자.. 사도바울은 말한다.. "내 안에, 정확히 말하면, 선한 것이 조금도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선한 것을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한 것을 어떻게 행할지는 내가 알지못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즉, 선을 갈망하고 원하거나, 생각하고 의식하는 것 자체는, 결코, 선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고, 선이라고 착각하지 말것을 먼저 선언을 해놓은 다음에, 하는 말이, 바로 21절이란 것이다.

다시말해, 21절의 설명은, 내 속에서, 선과 악이 공존해서 서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가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선한 것을 원하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에 자신을 위한 악이 있다"라고 설명되져야 옳다는 것이다.. 나의 이 설명을 듣는 어떤 이들은 '너무 확대된 설명과 해석 아니냐' 고 말할 이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구약성경, 즉, 율법에 대한 진정한 그 목적과 그 뜻을, 다시 설명하고 보여주신 것이며, 사도바울의 율법에 대한, 모든 말과 논리들 또한, 스스로의 깨달음과 연구를 통해서 정리되어진 말과 논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성령을 통해, 율법을 다시 설명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바로 바울의 율법에 대한 설명과 논리라는 사실이다.

즉, 율법에 대한 바울의 모든 말과 논리는 다른 무엇도 아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대한 설명과 풀이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우리안에서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은, 선과 악이 아니라. 타락을 통해, 내게서 발생된 악으로 하나님의 선을 구분하게 돼서 부산물적으로 인간에게 생겨난 찔림의 고통, 즉,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상대를 위하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형상을 담고 있었던, 그릇인, 양심에 맞지않는 어그러짐의 고통에 의한 고발이고, 성령의 역사와 악의 싸움일 뿐이다.

자아, 그러면, 나는 왜, 율법의 목적을, 지속적 목적과, 일시적 목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을까.
그동안 나의 글들을 읽고, 그 글들의 핵심 주제를 아는 이들은, 이미 나의 의도를 파악했겠지만,  전에 쓴 글에서 여러번 언급했듯이.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라고하신, 창세기 2장 16절~17절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존재의 가치에 대한, 그 기준이 무엇임을 보게 하셨기 때문이다.

즉, 타락 이전엔, 죄가 사람속에 들어오기 이전이기에, 그 죄의 원인체인 자기애(自己愛)는 그것 자체가 자멸하는 죄라는 경고이고, 만약, 자기애(自己愛)로 인해, 자멸하게 됐을때, 그 자멸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나를 따라 너희도 함께 죽어져야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이 설명이 가능한 이유는, KJV성경을 직역해 보고 있기 때문이며, 이 부분에 대한 나의 이러한 설명을 이해하려면, '죽어야 산다' 하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구약에 대한 설명임을 기억하라.] 이와 반대로, 상대만을 위한, 하나님의 그 사랑만이 너희의 존재의 이유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저, 창세기 2장 16절~17절까지의 말씀이다.

그러나, 타락 이후엔, 죄가 사람속에 들어왔기에, 그 죄와 자기애를 이기는 방법으로써, 죽어있는 자들의 못습이 어떠해야 함을 제시하고 보여주신 것이, 하나님의 벗, 곧 아브라함의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신실함의 모습이고, 바로 그 자기 죽음의 신실함을 이루어갈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상형문자로 제시해 놓은 것이, 바로 십계명, 즉, 율법인 것이다.

자아, 그러면, 율법에 근본적 속성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이고,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존재의 가치와 삶을 부여받고, 영위해 가야하는 피조물인 인간이 끝까지 지키고 유지해 갔어야 했던, 하나님의 그 사랑의 형상(히브리 원어의 뜻 = 하나님의 그림자)이고, 그 형상의 실체는, 말씀이신 하나님, 즉, 예수님이시다.

다시말해, 이 말은,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자체라는 뜻이고, 그 율법이신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회복 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그 형상의 본체라는 뜻이다. 왜냐면, 율법의 완성은, 상대를 위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의 예수의 그 사랑이고, 예수가 그 사랑의 율법의 시작이시기에, 그 율법의 완성과 끝마침을 하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도 바로 예수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람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산다." 라고, 구약에 말씀을 인용하여, 사탄을 대적하신 예수의 뜻이고,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의 뜻이다.

나의 이 설명에 대해서 이의를 재기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왜냐면, 로마서 10장 5절~8절까지 사도바울은, 율법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을 말씀하고 있는 신명기 30장에 말씀을 인용해서, '믿음의 의'가 무엇임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신명기 30장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신명기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다른 민족들과, 세상 모든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본이 되고, 가르치는 민족이 돼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읗 세분화해서, 가르쳐 주고 계신 것이, 바로, 신명기이고, 30장은, 결론적으로 이 모든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은 사람의 의지적 힘과 능려으로 행할 수 있는 명령의 말씀이 아니고, KJV 한글 권위역 성경을 통해 보면, 30장 14절에 정확한 뜻은, "하나님의 그 말씀이 너희로 하여금, 그 명령의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려고, 가까이, 곧, 너희의 그 입과, 그 마음에 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게 신명기 30장이다.

저 구절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의미와는 다르다. 즉, 개역판들을 비롯해 이송오목사의 한글 KJV와, 정동수목사의 흠정역 KJV까지도, 모든 한글 성경들은, 마치 하나님의 그 명령의 말씀을 내가 듣고, 내게 기억되어저 내속에 있게 되고, 그래서 내가 행할 수 있다는 의미로 알아 듣도록 번역들을 해놓았지만, 한글 권위역 KJV성경은, 하나님의 그 명령의 말씀을 행할수 있는 그 능력 자체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사람에게서 그 말씀의 명령을 실제 행위로써 표출되어 나오게 한다는 의미로 번역을 해놓았다는 사실이다.

바로, 구약의 이 구절을 인용해서, 사도요한과 사도바울은, 그 말씀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시고, 그 말씀의 명령은, 사람의 의지적 노력과 힘과 능력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그 믿음을 말하고, 믿음의 말씀을 말하는 바울은, '믿음은 듣는것, 듣는것은 하나님의 그 말씀이다.' 라고 선언한다. 즉, 이 말은,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고, 우리에게 실제 행위로써 표출되어 나오게 하는 힘과 능력의 원동력인 하나님의 그 말씀이 예수님이시고,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는 그 믿음 또한 예수님이시라는 말이다. 즉, 이 말은, 율법과 믿음은 종이의 양면과 같이 하나라는 말이다.

왜냐면, 율법과 믿음은, 완성하는 그 방법이 똑같기 때문이다. 즉, 상대를 위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이, 하나님에 정하신 유일한 방법과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 모두에게 회복되어져야 할, 하나님의 그 형상이 누구의 어떤 모습이고, 그 형상을 회복한 사람은, 누구를 닮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하고 있는것이 곧 히브리상형문자로 나타내신 십계명인 것이다.

또한, 그 설명을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즉, 상대만을 위한, 자기 죽음의 그 사랑의 본을 통해 스스로 보여주시고, 첫번째 열매가 되신분이 예수이시다. 즉, 그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살려 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상대를 위해, 자기를 죽이는 자들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그 형상을 완전히 상실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한,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자기애만으로 가득차게 되어진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능력과 힘, 그리고, 자신의 그 어떤 노력과 수단과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그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한, 저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그 본체, 즉, 예수님과는 완전히 달라져서, 원수가 되어진 죄라는 사실을 알게하려는 것이, 율법의 첫번째 일시적 목적이다.

율법의 두번째 일시적 목적은, 아브라함의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그 신실함(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함)이 없이는, 결코 율법의 진정한 목적을 이룰수 없다는 그 사실을 알게하려는 목적이다. 또, 율법의 세번째 일시적 목적은, 이 모든것을 통해, 아브라함의 고백과 같이, 우리모두를 위해 어린양이 되어 죽으시는 하나님, 즉, 예수님을 바라보게하는 목적이다. 이 세번째 목적은 일시적 목적이면서, 동시에 지속적 목적이다.

그런데, 저 율법의 일시적 목적에 대한 완성은,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율법의 진정한 속성은, 하나님의 그 말씀이고,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시다. 율법, 즉, 오로지 상대를 위한,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의 저 사랑의 법은, 하나님에게서 발생되어져서, 하나님으로 하나님되게하고, 사람으로 사람되게하는 존재론적 질서의 법이고, 또한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위해, 시작하셨고, 지키셨고,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위해, 지켜가시고, 이루어가시는 법이다.

하나님의 본체 그 자체이신 예수.. 바로, 그 예수께서 자기의 삶의 모습과, 나무에 달려죽으심과, 부활의 모습으로 보여주셨고, 가르쳐주셨고, 그 목적을 자기의 몸으로 완료하셨고,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예수님 자기와 같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을 이루고 있는, 예수의 사람들을, 예수 당신의 그 형상으로 다시 살리시고, 변화시켜주심으로, 율법의 일시적 목적을 완료하실 것이다.

허나, 저러한 목적을 배치되게 하고, 반목하게 하는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기 부인과 자기 죽음의 그 신실함은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율법을 이용하고 있는, 유대인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자기 신념의 그 믿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음에 대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기 신념의 그 믿음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인가...

이 세상에서 나 한사람의 소원성취와, 출세와 영리영달을 위해, 그져 내가 교회 일이나 잘하고, 내가 담임목사 말이나 잘 듣고, 십일조와 헌금이나 잘하고, 그래서 내게 내려질 복만을 갈구하고, 내가 죽어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목사에게서 배운 지식화, 관념화, 습관화, 의무화된 자신의 의지로 말미암은 자기 신념의 믿음을 가지는 것, 이곳이 바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자기 신념에 의한 그 믿음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 아닌가...

과연, 유대인들의 자기 신념의 그 믿음과, 우리들의 자기 신념의 그 믿음이 다른것이 무엇인가..
"이 두가지 믿음에는 서로 의미가 다른 부분과, 서로 상충된 부분이 있지 않느냐"고? 아니,,없다.
율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그 말씀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 말씀은 누구인가.. 예수이시다..
그 자기 신념의 믿음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로지 단 하나, 자기 자신을 위해 율법과 예수를 이용하는 것, 똑같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믿음이, 자신을 위한, 자기 신념의 그런 믿음일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고 다시한번 신구약 성경을 통해 깊이 생각해야 할 아주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한글 성경들에서 단순히 개인들의 신념에 의한 믿음으로 번역하고 있는, 히브리어, '에무나(אמונה)' 라는 단어와,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 라는 단어의 뜻과 의미이다.
자아, 지금부터 나는, 위에 두가지 단어들에 원래의 뜻과 의미를 살려서, '믿음'을, '신실함' 또는 '믿음직함'으로 고처서 표현하겠다.

우선.. 히브리어 구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우리가 믿음만을 뜻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단어인, '에무나(אמונה)'라는 단어의 뜻은, '확고함, 안전, 신뢰성, 정직, 진리, 영구적인 의무, 성실, 평안, 신실성, 진실, 참으로', 라는 뜻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에무나(אמונה)’는, ‘아만'이란 단어가 기본 어원이고, 이 ‘아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신실하다, 진실하다, 신실하게 하다, 오른쪽으로 가다, 세우다, 양육하다, 확고하다, 신뢰하다, 믿다, 영구하다, 조용하다, 확실하다, 확신, 키우다, 실패하다, 유모, 지속하다, 지탱하다, 확고해지다, 성실하다, 견고하다, 부양하다, 팔로 나르다, 아이를 운반하다, 영구적인, 끊임없는, 마르지 않는’,이라는 뜻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아만'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성경 구절은, 창세기 15장 6절이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꿔 주시기 전)에게 수 많은 후손들을 주실 것을 약속하실 그 때, 아브람의 하나님께 대한 태도와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말씀하는 구절이다.
<voice required="Name=Junwoo">
[KJV 한글/영문 1611 권위역 성경, 창세기 15장 6절..]
이에, 아브람이 {주}를 믿었으므로, 그분께서 그것을 의로 계수하시고, 그 의를 그에게 돌리셨다. </voice><voice required="Name=VW Paul">
And he believed in the LORD; and he counted it to him for righteousness.</voice>

KJV 영문 1611판을 그대로 직역했다면, 위에 한글 권위역의 번역도 상당히 달라졌어야 한다. 즉, 저 구절의 문장을 신/구약성경 전체적 문맥을 통해 그대로 가져와서 의역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안에 그 신실함(믿음직함)이 아브람에게 있었고, 의를 위하여 그것을 그에게 더하시고 계셨다",라는 뜻이고, 이게 정확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번역을 했어야, 하박국 2장 4절의 뜻과 상통하게 되고, 로마서 3장 3절의 뜻과, 로마서 10장 17절과도 그 맥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아, 그렇다면, 도대체 하박국 2장 4절은 어떤 내용이고, 로마서 3장 3절은 어떤 내용일까.
내가 전에, 내 홈페이지에서,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글을 통해서 온전하진 않지만 이미 짧게나마 언급했던 부분이다. 먼저, 하박국 2장 4절의 하반절에는, 마소라 히브리어 기록과, 70인역 헬라어 번역에, '신실함(믿음직함)'의 소유격 조사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소라 히브리어 기록에는, '뻬에무나토(באםונתו)', 즉, '그의 신실함(믿음)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70인역 헬라어 번역본에는, '에크 피스토스 무(εκ πιστεωs μου)', 즉, '나의 신실함(믿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부 어떤 학자들은, 70인역 헬라어, 구약성경을, 마소라 히브리어, 구약성경과는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해서, 그 가치를 저 평가해버리는 이들이 있다. 물론 70인역은, 마소라 구약성경에는 없는 외경이 들어 있고, 누락되어 축소되거나, 차후에 추가 기록된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박국 2장 4절도 오역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뻬에무나토(באםונתו)'에서 3인칭 대명사인, '그'를 뜻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와우(ו)'를, '나'를 뜻하는, '요드(י)'로, 잘못 보고, 오기록했을 가능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알파벳 '와우(ו)'와, '요드(י)'는, 글자에 내리 긋는 획의 길이만 다를 뿐, 같은 모양세를 하고 있는 글자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사실은, 마소라가 맞느냐, 70인역이 맞느냐가 아니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신실함의 의', 또는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구원과 영생을 말하는 사도바울이 변증법적 논리의 기본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로 인용한 구절이, 바로 하박국 2장4절 하반절이란 사실이다. 그것도, 이 구절을 가져와 인용하는 부분을, 단순히 표면적으로만 보면, '신실함', 또는 '믿음'을 발생케하는 소유자에 대한 표현은 빼놓고, 그져,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라고만 말한 것처럼 보인다.

허나, 결코 그렇지 않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2절에서, "나와 너희의 공통된 신실함(믿음)에 의하여, 너희와 함께 강하게 되기 위해, 너희를 보기를 원한다", 라고 말하면서, 1장17절을 통해, 하박국 2장4절 하반절을 인용해, "그 복음안에 하나님의 의가 신실함(믿음)에서 신실함(믿음)까지 밝히 드러나 있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과연, 하박국 2장4절 하반절에, 원래 들어있는, 신실함(믿음)을 발생시키는 주 요체인, 소유자를 빼놓고 로마서를 기록했을까. 아니, 절대로 아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육체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임을 말하면서, 마음의 할례를 받지 않았다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다 말하면서, 3장에서, 그래도 유대인들이 나은 점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울은, 3장3절에서 믿음직함 곧 신실함의 진정한 제공자요, 진정한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힌다.
<voice required="Name=Junwoo">
[KJV 한글/영문 1611 권위역 성경, 로마서 3장 3절..]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않았다면 어찌되겠는가. 그들의 믿지 않음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로 만들겠느냐.</voice><voice required="Name=VW Paul">
For what if some did not believe? shall their unbelief make the faith of God without effect?</voice>

이 구절을, 구약 창세기 15장 6절에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안에 그 신실함(믿음)이 아브람에게 있었고, 의를 위해 그것을 그에게 더하시고 계셨다",라는 말씀으로 구약과 신약성경에 하나의 같은 맥으로 이어주는 구절로써,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대로 가져와서 연결시켰다면, 신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야 하는 '신실함 또는 믿음'에 대한 원래 뜻과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즉, 단순히 개인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인간에게서 발생되는 신념에 의한 표출적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을 통해, 사람속에 창조되어져, 내재되는,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함과, 충실함과, 신실함"으로 인식하게 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로마서 3장 3절을, 그져 단순하게 하나님의 그것은, 약속을 지속적으로 이행해가는 믿음직함이고. 사람의 그것은, 하나님의 그 미쁨을 믿어주는 관념적 신념이란식으로 번역을 해놓은 결과로, 치명적인 오인을 하도록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로마서 3장 3절에, "the faith of God(헬라어 = τὴν πίστιν τοῦ Θεοῦ)", 이라는 말에, 헬라어, 피스티스(πίστις)에 대한 번역을, 이 단어의 원래 담겨저 있는, 그 뜻과 의미대로, "하나님의 미쁘심, 하나님의 성실함, 하나님의 신실함"으로 번역을 해놨는데, 상반절에 언급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것도, 같은 뜻과 의미의 단어로 번역을 했어야 옳다는 것이다. 즉, 새번역성경과 같이 말이다.

즉, “사람들에게는 믿음직함이 없지만, 사람들에게 믿음직함이 없는 그것이 하나님의 믿음직함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이렇게 번역을 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번역을 해야 문맥적으로 다음 구절인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다.” 라는 말과 정확하게 뜻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아, 우리 한번 논리적으로 깊이 생각해 보자.
3절 상반절, 두번의 ‘믿지 않는다(아피스테오 ἠπίστησάν, 아피스티아 ἀπιστία)‘고 표현한 말과,  4절 상반절, ‘거짓말쟁이다(프슈스테스 ψεύστης,)‘라는 말이, 그 뜻과 의미가 서로 어우러질 수 있는 직선적으로 상통하는 말일까. 저 논리를 그대로 적용시켜 말한다면,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불신을 뜻하는 부정형 동사인 '아피스 테오(ἠπίστησάν)'와, '아피스 티아(ἀπιστία)'라는 두단어의 근본적이고, 공통된 어근은, '불충실'이란 뜻과, '신뢰할 수 없는 {사람}', 또는, '믿을 수 없는 {사물}'을 뜻하는 '아피스 토스(ἄπιστος)'라는 단어이다. 즉, 이 말은, 3절과 4절을 문맥을 이어서 보면, 하나님은 참되시기에 믿음직한 분이란 뜻을 알 수 있듯이, 반대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타락의 본성과 속성인 자기애가 원인으로 작용해서 거짓말을 하기에, 믿음직함이 없는 신뢰할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을 알 수 있다는 말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속한 것은, ‘미쁘신 분’이라는 말과, ‘참되신 분’이라는 말로, 음악의 딸림 화음처럼 서로 어우러지는 직선적으로 상통하는 말로 짝을 지어 놓고, 사람에게 속한 것은, 전혀 어우러지지 않는 말로 짝을 지어 놨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이것은, 하나님은 참되시기에 믿음직한 분이고, 우리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쟁이이기에 믿음직함이 없다라고 해야, 3절과 4절이 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러한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사실을 전부 간과하고, 그져 사람의 교리에 맞춰서 번역한 부산물적 결과라는 것이다.

3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상반된 존재가 되어 있음을 나타내주고, 대비시켜 비교해주려면, 같은 뜻과 의미의 공통된 단어로, 현재의 하나님과 사람의 속성적 상태와, 현주소를 대비시켜서,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할 수 있도록 번역을 했어야 옳았다고 생각한다.

자아, 여기서 우리는, 로마서 3장 1절~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 아니, '믿음직함(미쁨), 신실함, 성실함, 충실함'에 대한 근본적 속성과 기준을 무엇이라 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누구에게서 발생되어져야 하고, 그것에 진정한 소유자를 누구라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개인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신념이라고 알아 듣도록 번역된, 한글 번역본들의 믿음이라는 명사 표현을 그대로 가져와 말하면,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공통된 조건/기준을 대비시켜서, 인간의 거짓과, 하나님의 참됨을, 모두에게 들어내어 직시하도록 하고 목도하게 한다. 그런데, 이렇게 믿음을 공통된 조건/기준으로 대비하기 전에, 바울은, 바로 직전 구절인 2절에서, 유대인에게 맡겨진 그것이 무엇임을 말한다.

유대인이 이방인보다 나은것이 무엇이냐 물으면서,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나은것이 있다면,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맡겨졌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며, 3절과 4절에서 인간의 믿음과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공통된 조건/기준을 대비시켜서, 인간의 거짓과, 하나님의 참됨을 증명한다. 즉, 사도바울이 같은 의미의 조건과 기준의 단어로 대비시켰던 이것을 단순히 신념으로 생각하고 말하려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믿음, 곧, 미쁘심, 또는, 믿음직함과 신실함과 성실함의 근원적 원천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그 진리의 말씀을, 우리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죽으려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믿음직함과 신실함과 성실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더러, 그들은 인식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기껏,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 그 자체요, 참과 진리의 말씀이신 율법을 이용해먹으려 했을 뿐이다. 사도바울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말하기 위해서, 저 두가지 믿음을 대비시켜서,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저 믿음직함과 신실함과 성실함 앞에, 자기 자신을 위해 인간에게서 돌출된 모든 신념은 다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다시 말하면, 유대인에게 맡겨졌던, 하나님의 그 말씀이, 하나님의 그 믿음, 곧, 미쁘심,또는, 믿음직함과 신실함과 성실함이란 말이고, 유대인에게는 자신들에게 맡겨졌던 하나님의 그 말씀에  대한 이러한 지식이 없었다는 말인 것이다. 그리고 또,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믿음직한 벗이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그 말씀이 들어가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의, 하나님과 같은 그런 충실함과 성실함과 신실함과 믿음직함으로 표출되어져 나왔고, 하나님은 바로 그런 아브라함의 충실함과 성실함과 신실함과 믿음직함을 구체적 방법으로 문자로 나타내 보여주신 그것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그 율법의 말씀임을 알지못했다는 것이다.

자아, 그러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과 같은, 그 믿음직함과 신실함과 성실함과 충실함은, 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으로 표출됐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바로, 창세기 22장에 이삭과의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다.
<voice required="Name=Junwoo">
[KJV 1611 권위역, 한글 창세기 22장 7절~13절..]
(7) 그때에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했다. "내 아버지여." 이에 그가 말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다." 그러자 이삭이 말했다. "불과 나무를 보소서. 그런데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8절) 이에 아브라함이 말했다.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 헌물로 쓸 어린양으로 준비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둘 다 함께 갔다.
(9절) 그렇게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려 주셨던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기에 제단을 쌓고, 가지런히 나무를 놓고는, 자기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나무 위에 놓았다.
(10)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손을 내밀어,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잡았다.
(11) 그때에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에 그가 말했다. "제가 여기 있습니다."
(12)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 손을 그 아이에게 대지 말라. 너는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왜냐하면 네가 네 아들, 곧 네 유일한 아들을 내게 아끼지 않은 것으로 보아, 네가 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내가 이제 알기 때문이다."
(13) 그때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았다. 그런데, 보라, 뿔이 덤불에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자기 뒤에 있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자기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 헌물로 드렸다.</voice>

8절을 주목하라.

“내 아들아, [하나님]께서 자신을 번제헌물로 쓸 어린양으로 준비하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 구절에 번역은 종전에 한글 번역본들과는 그 뜻과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종전에 번역본들은, 하나님과 번제물인 어린양을 따로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도록 의역들을 해놨고,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위해 어린양을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 의역들을 해놨다.

그러나, KJV 1611 한글 권위역은, 하나님과 어린양은 동일한 존재로써,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번제물로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 직역하고 있다. 즉, 다시말해,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칼을 집어들려 했던 행동은, 우리를 위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로 스스로 죽으시는 하나님과 함께, 자기도 죽어지는 행동이었고, 8절의 저 고백을 실체로 표출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우리 자신에게 반드시 물어야만 하는 아주 중요한 질문의 벽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믿음, 곧, 하나님의 신실함, 하나님의 성실함, 하나님의 믿음직함(미쁘심)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다.. 하나님 자기 자신인가.. 아니, 결코 아니다. 분명코 사람을 위한 신실과 성실과 믿음직함이다. 아브라함의 그것도, 결단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만약, 아브라함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면, 저 행동은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우리 모두가 명백하게 인식하고 염두에 둬야할 것은, 아브라함의 저 신실함과 성실함과 충실함과 믿음직함 자체는 아브라함 스스로에게서 저절로 표출되어 나온, 자기 신념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약속의 그 말씀이 먼저 아브라함에게 들어가 그것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즉, 정확히 말하면, 아브라함에게서 표출된,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 같은 모습의 신실함과 성실함과 충실함과 믿음직함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으로 표출되었던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이란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그 명령의 말씀을 행하도록 함께 하신다", 라고, 위에서 이미 설명한, 신명기 30장에 대한 설명으로 그 맥이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고, 그리고 이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신 말씀에, 근본적 이유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이 나의 벗이라 부르셨던 아브라함의 그 믿음, 아니 믿음직함이다.

그렇다면, 나와 여러분이, 자기 신념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믿음이라고, 착각과 오인속에 빠져서 자기를 속이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우리의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우리의 그것은 하나님의 그 믿음직함과 같은가. 그것이 아니면, 우리의 그것은 하나님의 그 말씀이 들어가서 창조되어진 아브라함의 그 믿음직함과 같은가.

분명히 말해, 하나님의 그 믿음직함과, 아브라함의 그 믿음직함의 근본적 속성과, 최종적 결과에 공통적 분모는, 하나님의 그 말씀이며, 상대를 위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이다. 허나,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믿음직함과 성실함을, 고작, 자기 자신의 의지로 발생시켜서 관념적으로 신념하고, 믿어드리는 것을 가지고, 그러한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믿음이고, 그런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들의 의로 여겨주신다고 말하고 있는게, 지금의 우리 모습 아닌가.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선심이라도 쓰듯이 말이다.

만약, 우리의 그것에 근본적 속성이, 하나님의 그 믿음직함과, 아브라함의 그 믿음직함과 똑같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 근본적 속성이라면, 그에 따르는 최종적 결과에 열매는, 당연히 상대를 위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이여야만 하는데, 우리에게 그런 열매가 있는가.. 솔직히 우리의 그것, 우리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그것은,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로지 한가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이게 전부 아니냐 이 말이다.. 구원 받기 위해, 천국 가기 위해, 영생 얻기 위해, 예수를 믿어드려서, 예수를 이용하려고 하는, 이게 우리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전부다.

그러나, 우리의 그것에,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구원도 천국도 영생도 아닌, 나를 만드신 창조주 그분 하나님과 같이 하는 것이여야 한다. 구원과 천국과 영생은, 그분 하나님과 같이 하기 위한, 과정과 수단과 방법이다.. 이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고, 그분의 뜻이다. 그런데, 우리의 예수를 따르는 그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저토록 왜곡되고 비틀어질 수 밖에 없는 그 원인과 이유가 뭔지 아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함'도 아니고, 개인에게서 자기 의지로 표출된 신념을 믿음이라 여기고, 그런 자기 신념을, 자기 공로와 자기 공적화 해서, 하나님과 같이하고픔이 아닌, 구원과 천국과 영생을 얻기 위해, 그 자기 신념을 도구와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간의 자기 의지에서 나온 신념은, 결단코 하나님께로 나온 그 말씀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리의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로 자기죽음을 이루어야만 하는 자들이고, 그에 따라서, 인간의 자기 욕심의 신념도 전부다 죽어져야만 하기에, 그런 자들의 속에는, 말씀이신 하나님만이 살아계시므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인간의 자기 욕심의 신념은 표출될 수 없고, 하나님의 그 신실함과 충실함과 성실함과 믿음직함이, 상대를 위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자기 죽음이 되어져서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의 자기 의지의 신념도, 자기 부인과 십자가로 죽어져야 한다는, 나의 말에, 거의 대부분 반감을 느끼고, 이의를 제기할 이들이 분명 많이 있을 것이다. 이 글의 끝마무리로, 얘기하겠지만, 모두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 질문 하나를 먼저 던져놓고 다음으로 이어가겠다.

질문.. : 우리가 가져야 할 그것이, 인간의 자기 의지에 의한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님과 똑같은 그러한 충실함과 성실함과 신실함과 믿음직함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으로 회복 되어져야 하는 그 결과가, 과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신념일까.? 그러면, 정확히 묻겠다. 타락한 인간이 잃어버린 그것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자기 신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신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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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율법은 하나님의 그 말씀이고,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바로 그 율법이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그 믿음직함(신실함)이다." 나의 이 말은, 결코, 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은 다 알 것이다. 왜냐하면, 같은 로마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이 위에 내가 언급하고 있는 이런 사실들을 이미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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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V 1611 한글 권위역, 로마서 10장 1절~21절...]
(1) 형제들아, 이스라엘을 위한,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2) 왜냐하면, 내가 그들을 증언하건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열심은 가지고 있으나, 지식의 앎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쓰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의가 되셔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셨기 때문이다.
(5) 왜냐하면 모세는 율법에 의한 의를, "내가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로 말미암아 살게 하겠다." 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기술하지만,
(6)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는 이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곧 "네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다.
(7) 혹은,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8)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곧 네 입 안에 있으며, 네 마음 안에 있다." 라고 말한다.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에 의한 말씀이다.
(9) 이것은,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님]을 시인하며 받아들이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부활시키신 것을 네 마음 안에서 믿을 때, 너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10)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되고, 입으로 시인하며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11) 왜냐하면 성경이, "내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12) 왜냐하면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 위에 계신 동일한 [주]께서, 자신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풍요로우시기 때문이다.
(13) 왜냐하면 [주]께서, "내가 누구든지 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14) 그렇다면 그들이 믿지 않은 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듣지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느냐? 말씀선포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
(15)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그들이 어찌 말씀 선포하겠느냐? 이것은 "화평을 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좋은 일들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자들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라고 기록된 것과 같다.
(16) 그러나 그들이 모두 복음에 순종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주]여, 저희가 전해 준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 의하여 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온다.
(18) 그러나 내가 말한다.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그렇다 참으로 그들은 들었다. "하늘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하늘들의 말들이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 라고 기록된 것과 같다.
(19) 그러나 내가 말한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느냐? 먼저 모세는 말한다.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에 의하여 너희를 자극하여 질투를 일으키겠고, 어리석은 민족에 의하여 너희의 분노를 일으키겠다."
(20) 그러나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말한다. "나를 찾지 않던 자들로 하여금 나를 발견하게 하였고, 내게 구하지 않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21)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토록 손을 내밀었다." 라고 말한다.</v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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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은, 이스라엘에 구원을 소원한다고 말하며, 2절과 3절에서 이스라엘이 구원의 조건으로 갖지 못한 그것이 무엇임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설명해준다.

즉,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지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아는, 그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4절에서, "예수께서 모든 믿는 사람, 한사람 한사람에게, 의가 되셔서, 율법의 끝마침이 되셨다." 라고 말하며, 5절부터 8절까지, 신명기 30장 10절~14절까지의, 구약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로 인한 '율법의 끝'이 무엇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가르쳐준다.
<voice required="Name=Junwoo">
--- "모세는 율법에 의한 의를, '내가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로 말미암아 살게 하겠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기술하지만,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곧, [네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예수님을 위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다. 또,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예수님을 다시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곧, 네 입안에 있으며, 네 마음안에 있다.] 라고 말한다...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voice>

..라고 말이다..

자아, 그런데, 저 구절에서 대괄호안에 들어 있는 구절은, 신명기 30장 10절~14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하는 구절이다. 우리가 여기서 깊이 생각하고, 신명기 30장과 비교하며 주목해서 묵상해야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voice required="Name=Junwoo">
[KJV 1611 한글 권위역, 신명기 30장 10절~14절...]
(10) 왜냐하면 내가 너로 하여금 나 {주} 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게 하겠고, 이 율법 책에 기록된 나 {주} 네 [하나님]의 명령들과 법규들을 지키게 하겠으며, 네 마음을 다하고, 네 혼을 다하여 나 {주} 네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하겠기 때문이다.
(11) 왜냐하면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이 명령이 네게 숨겨진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12) 이 명령이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닌데, 너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그것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는구나.
(13) 또한 이 명령이 바다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닌데, 너는,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넘어가, 그것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는구나.
(14) 허나 반대로 그 말씀이, 너로 하여금 그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려고, 네게 지극히 가까이, 곧 네 입 안에 있으며 네 마음 안에 있다.</voice>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사도바울은 신명기 30장에 저 구절을 인용하면서, 로마서 10장을 통해, '특정 목적을 위한 행동들에 대한 질문'들을 공통으로 인용하며, 그 행동들에 의한, 목적에 따르는 결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결과로 제시하고, 신명기 30장에 그 목적어가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가에 대해, 바울 자신이 제시한 결과가, 곧, 그 목적과 동일한 하나라는 그 진리를 알려주고 있기에, 동일한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주목하고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자아, 그러면 우선, 신명기 30장과, 로마서 10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특정 목적을 위한 행동들에 대한 질문'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그 명령의 말씀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겠는가'. 또,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넘어가, 그 명령의 말씀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는 그 행동들에 대한 질문이다.

신명기 3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가 듣고, 자기의 의지로 행해야되는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 즉, '율법의 말씀'을 얻기 위해, 우리를 위해 누가 하늘로 올라갈까. 누가 바다를 넘어갈까.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에서, '율법의 말씀을 얻기 위한, 목적의 행동들에 대한 질문'들을 가져와 서술하면서, 그 행동들에 의해서 중간에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우리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떤 말로 서술한다.

-- 첫번째의 행동들에 대한 질문.. --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로 올라가, [그 명령의 말씀]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네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다." 라고 중간에 발생할 결과를 말한다..

-- 두번째의 행동들에 대한 질문.. --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넘어가, [그 명령의 말씀]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로 하여금 듣고 행하게 하겠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네 마음 속으로,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다시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라고 중간에 발생할  결과를 말한다..

그러고나서, 사도바울은, 저 두가지 질문들에 대한, 최종 결과적 답변인, "그러나, 그 말씀이(그 말씀 자체가), 너로 하여금 그 말씀을 행할 수 있게 하려고, 네게 지극히 가까이, 곧 네 입 안에 있으며, 네 마음 안에 있다." 라고 한, 신명기 30장의 이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서 같은 뜻으로 적용시킨다. 즉, 이렇게 말이다.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곧 네 입 안에 있으며, 네 마음 안에 있다.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에 의한 말씀이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질문으로써 깊이 생각하고 설명을 요청해서 답을 찾아야할 게 있다. 그것은, 곧, '율법의 끝마침'이란 말에 대한 뜻과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저 변증법적 논리들을 다시 정리해 보자.. KJV 한글 권위역의 번역으로 보면, 사도바울은, "이스라엘에 구원을 소원하며, 하나님께 그것을 위해 기도한다" 말하며, 그 소원과 기도에 네가지 이유를 통해, 이스라엘이 구원 받아야할 당위성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으로 이방인인 우리들의 구원도 똑같은 이유라고 설명해준다.

[첫째. 2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갖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서 표출되어진 지식에 의한 열심이 아니기 때문이고...

[둘째. 3절..]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그 결과로 인해, 율법의 말씀을 이용해,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애를 쓸 뿐, 하나님의 의, 즉, 위에서 이미 짚어보며 설명한, {하나님의 그 약속에 말씀을 받고 들은, 아브라함에게서 표출되어졌던,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곧, 상대를 위한, 자기 죽음의 그 말씀에 신실함과 충실함과 성실함과 믿음직함}의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셋째. 4절..] 그래서 저 모든것을 인간의 노력과 능력과 방법과 수단으로는 결코 온전히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의 그 율법의 말씀 자체이시며, 시작}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 한명 한명에게 의가 되셔서, '율법의 끝'이 되셨다. 라고 말한다.

[넷째. 5절부터 9절까지..] 위에 이미 적어 놓은 내용으로 다시 반복해서 말하지만, 사도바울은.. "모세는 율법에 의한 의를, '내가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들로 말미암아 살게 하겠다.'라고 하나님의 뜻을 기술하지만,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는 이같이 말한다. 곧, [네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예수를 위로부터 모셔 내리려는 것이다. 또, '누가 깊음 속으로 내려가겠느냐,'라고 말하지 말라. 그것은 예수를 다시 죽어 있는 자들로부터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그 말씀이 네게 가까이, 곧, 네 입안에 있으며, 네 마음안에 있다.] 라고 말한다... 곧,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고, 율법의 말씀을 얻기 위해, 누가 하늘로 올라갈까. 누가 바다를 넘어갈까. 라고 했지만, 사도바울은, 그런 말들을 하는것은,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는 짓이고, 또 그리스도를 다시 죽여서 살려내겠다는 짓이다. 라고 말한다. 사도바울의 논리를 가만히 주위깊게 생각해보자. 과연, 저들의 저런 말들과 행위들 속에,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는가.. 안보인다.. 그져 인간인 내가 주체가 돼서, 내 능력과 노력, 내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율법의 말씀을 이용해먹으려는 자애적 모습 밖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저 말씀을 통해, 바로 이런 사실도 지적해주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그 믿음이란 단어 그것도 하나님의 그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율법이 하나님의 그 말씀이듯, 믿음도 하나님의 그 말씀이란 것이다. 자아, 그러면, 말씀을 얻기 위해, 저 말들을 하는데, 사도바울은 그 말씀을 무엇으로 동일시하고 있고, 무엇으로 동의어를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곧, 예수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의 그 율법의 말씀이 예수이고, 하나님의 그 믿음의 말씀 또한 예수라 이 말이다,

자아, 그럼 다시 반복한다. 우리안에 있어야만하는, 하나님의 그 율법과 믿음의 말씀은 누구인가. 분명코, 예수이시다. 인간의 의지적 신념으로 저 말씀들을 받는게 아니다. 그 말씀이 사람들 귀에 선포되고 들려질 때, 그 말씀을 받게 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구원이 시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네가 네 입으로 예수를 시인하여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어있는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사실을 네 마음안에서 인정하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어 있는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그 사실을 우리 마음속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려면, 인간의 신념이 아닌, 말씀이신 예수가 우리안에 임재해 계셔야하고, 그것으로 우리는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로 죽어져 있는 상태의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냐면, 그 전제 조건은 곧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예수와 함께 부활하기 위해, 예수와 함께 죽는, 죽음에 첫시작이기 때문이다. 즉, 스스로 자기 자신을 번제물 어린양으로 준비하시고 죽으신 하나님을 따라 죽은 아브라함의 그것과 같이 말이다.

자아, 그러면, '예수님이 율법의 끝' 이라는 사도바울의 말은 무슨 뜻일까.. 기존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해석처럼, 단순히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위해, 대신 이루셨기에 '율법의 끝'이란 말일까.. 아니, 절대로 그런식의 끝이 아니다. 그 답은 바로, '그 말씀이 네 안에 있다.' 라고 한, 이 말속에 들어있다. 즉, 다시말해, 그 말씀은 곧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그 말씀(예수)을 받아들이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로 죽어져 있는 우리 각자에게 내재하신다.

즉, 이 말은, 그 율법과 믿음의 말씀이, 우리들 각사람의 영과 마음판 안에, 새겨지고 각인된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예수의 그 사랑의 형상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 각사람에게 그 율법과 믿음의 말씀이 새겨지고 각인되어진 그 상태가, 바로 예수께서 율법의 끝이 되신 상태이다. 그리고 또한 그 말씀이신 예수께서 그 말씀을 상대를 위한 신실함과 충실함과 성실함과 믿음직함으로 우리들 각사람에게서 표출되어 나타내게 하신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율법의 끝이 되신 것이다. 우리 각사람안에서 말이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의 믿음(신실함과 믿음직함)의 의다. 인간의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신념의 의가 아니라.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로 죽어져있는 우리 각자에게 내재하시는 예수님께서 표출되게 하시는, 그 말씀에 의해, 상대를 위한, 그 신실과 충실과 성실과 믿음직함의 의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한다. "믿음은 듣는 것에서, 듣는 것은 하나님의 그 말씀이다." 라고..

자아, 이제 끝으로, 위에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하겠다.
질문.. : 우리가 가져야 할 그것이, 인간의 자기 의지에 의한 신념이 아닌,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창조된, 하나님과 똑같은 그러한 충실함과 성실함과 신실함과 믿음직함이라면, 우리가 예수님으로 회복 되어져야 하는 그 결과가, 과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신념일까.? 그러면, 정확히 묻겠다. 타락한 인간이 잃어버린 그것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자기 신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신뢰인가...
 
자아,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상대를 배신해서 신뢰를 잃어버린 그 대상은, 하나님인가. 인간인가. 다시 말해서,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배신하셨는가.. 아니면, 인간이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배신했는가..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은, 그 말씀이신 하나님은 단 한순간도 인간을 배신한 적이 없다.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인간이 배신했다는 사실이다..

자아, 그렇다면, 상대에게 신뢰를 다시 제공하고 회복해야할 대상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인간을 배신해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상실해버렸기에, 상대에게 믿음과 신뢰를 다시 제공하고 회복해야 하는 대상이 하나님이신가... 아니, 상대에게 신뢰를 다시 제공하고 회복해야할 대상은, 그 말씀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한 인간이다..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의식 한가운데, 확실하게 새겨두어야할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앞에, 잃어버린 믿음직함의 신뢰는, 결코, 인간의 자기 노력과 수련과 덕행으로는, 또 자기 신념으로는, 결코, 하나님께 믿음직함의 신뢰를 제공해드릴 수도, 회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 모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말씀을 듣고 받은 사람은 반드시 상대를 위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로 죽어져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그 말씀이, 우리에게서 하나님과 같은, 그런 신실함과 충실함과 성실함과 하나님 보시기에 믿음직함으로 표출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아,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우리속에 있는 그것은, 자기 신념인가. 그 말씀의 믿음직함인가...

[누가복음 18장 8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나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믿음을 발견하겠느냐?"


[추신... : 써야 할 내용은 아직 많고, 미쳐 못다한 말이 있지만, 목디스크로 인해, 팔과 손가락에 힘이 계속 빠져가고 있는 상황이라, 하루에 한 줄 쓰기도 힘들어서, 1년 반이 넘게 걸린 이 글.. 이 소중한 내용의 글을, 부족하고 죄스러운 나의 손을 통해, 끝까지 끝낼 수 있게 해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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