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 공표 시기 : 1994년 ~ 1997년
PC통신 하이텔 동호회 KCM(한국컴퓨터선교회)의 자유게시판 통해 첫발표, 출판 활자 공표 : 1998년 6월 PC통신 하이텔 소모임 '기독교문학모임'에서 출간한 회원문집 "파란 글밭에 부는 하늘바람"을 통해, 1. 기도를 위한 기도, 2. 나는 이제야 당신을, 3. 당신의 계심만으로, 4. 사랑을 준비하는 이에게 쓰는 편지.. 등 네 편에 시가 실림... 이 회원문집에서 본인의 시평을 써준 임병남씨의 시평 : (김성진의 시 세계) -詩評- 존재와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는 어느 구도자의 기도 - 임병남 - 김성진의 시는 읽는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그의 시가 얼마만한 사색의 끝에서 얻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어찌된 일인지 그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나는 그를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언젠가 수화기를 통해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것도 그의 힘겨운 발음으로 인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동병상련의 심정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는 나처럼 몸이 불편하다."라는 사실에서 오는 이 느낌! 하지만 정작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 그가 얼마나 깊이 있는 시인·신앙인인가 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불편한 육체적 상황을 훌쩍 뛰어넘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있다는 데서 오는 깊은 안도감과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시인으로서의 김성진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우리 기문모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김성진의 시는 드물다. 게다가 어떤 사정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사랑을 준비하는 이에게 쓰는 편지)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마저도 지금은 삭제되고 없다. 그러나 나는 (존재와 사랑의 의미)를 물으면서,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을 그를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예전에 갈무리 받아 놓은 그의 몇 안 되는 시를 가지고, 아주 오래 전에 이미 했어야 했을 일을 이렇게 느즈막히, 그와 그의 시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김성진 시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그의 깊은 신앙에 있다. 그에게 시는 아직까지는 신앙과 삶의 문제/주제에 대한 그의 깊은 사색/성찰의 결과를 수용하는 일종의 그릇인 셈인데, 사실 그의 몇 안 되는 시들마저도 개인적인 그 자신의 경험이나 상처의 흔적을 거의 내비치지 않고 있으며, 그의 사색의 어떤 경로를 통해 이미 정제된 관념적/내면적 언어들로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대부분은 또한 신앙의 고백에 가깝기 때문에 이로써는 그의 삶과 시를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기를 바랄 수가 없다. 딱 다섯 편의 시를 가지고 어떻게 그의 관점/생각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를 추적할 수 있으며, 또 그의 시의 의미를 찾거나 언급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자료에 입각한 정교한 분석보다는 억지 섞인 추론에 가까워지기 쉽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시에 대해 무엇인가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몇 안되지만, 그의 가장 뛰어난 시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기도를 위한 기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 (기도를 위한 기도)는 그의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시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적 특색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을, 한 영혼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울려 나오는 이 기도의 언어는 그가 "사랑"을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성진이 말하는 완벽한 사랑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사랑은 기도를 통해 멈추지 않고 타오르고 있다. 이 끊임없는 기도의 자세야말로 김성진이 파악하는 진정한 사랑의 자세이다. 그 자세는 어떤 자세인가. "내 가슴 가장 깊은 그 곳까지 비워"낸 채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포용하는 자세이며, 대상의 "가장 깊은 곳을 헤아리"는 이해의 자세이며, "그에게 필요한 가장 지고한 언어로 기도"하는 욕심없는 순결한 자세이며, "그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가장 깊은 곳에 그의 눈물"을 함께 흘리며 상대의 그 아픔을 체휼하려는 자세이며, "그를 위한 나의 기도가 멈추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결연한 자세이다. 실로 이 기도는 곧 사랑을 위한 기도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결하고 아름다운 자세는 바랄 수는 있지만, 이루기는 참으로 어려운 자세이다.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사랑)를 위해서 다시 역설적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는 것인데,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그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기 위해 신앙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극복의 의지는, 자신의 연약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음과 동시에 절대자를 의지하는 겸허한 신앙의 자세를 통해서 그야말로 신앙적 방법으로 발현되고 있다. 이것이 그가 깨달은 신앙이다. 그가 알고 있는 사랑은 참된 신앙의 힘 안에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아니면 이룰 수도 없을 뿐더러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존재의 의미를 찾기 시작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의 문제의식은 당연히 그의 지난한 생의 조건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죽음보다 더 큰/ 침묵이라는 시간 속을 헤매이던 어느 날,/ 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을 만큼/ 커다란 아픔이 내게 다가와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아마도 자의식에 눈을 뜨던 그 시절에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 채 괴로움 속에서 헤매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방황과 아픔은 단지 방황과 아픔으로만 끝나지 않고, 곧 그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데, 선현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참자아의 진지한 질문은 바로, "나는 누구며,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는 이 질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이 질문은 얼마 후 계시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에 의하면 그의 창조자는 "자신을 나누고픈 사랑을 견디지 못해/ 사랑하기 위해 우리를 있게 한 그는/ 우리로 사랑케 하는 사랑"이며, 우리가 "어떤 모습이건(관계없다는 이 홀가분함!-편집자 주)/ 우리의 생과 삶/ 그리고 우리의 존재 자체는/ 나의 창조자 그에겐/ 가장 큰 의미의 기쁨"임을 그는 알게 된다. "그의 사랑의 모습 그대로 있게 된" 이 존재들은 "그를 닮은 또 다른 모습의 사랑"에 다름아니며, "그 사랑 되돌아오지 않아도/ 나 아닌 다른 그 누군가를/ 사랑케 하는 사랑"에 의해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사랑해야 될 사랑"이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끊임없이 누군가의 생과 삶/ 그리고 누군가의 존재를/ 그대로의 존재를/ 기뻐하는 삶이"며, "끊임없이 나를 누군가에게 내어주기 위해/ 자기로부터/ 끝없는 여행을 떠나며 준비하는/ 사랑이어야"한다고 그는 깨닫는다. 이럴 때, "서로에게 존재의 기쁨이 되어주는 삶" 가능해진다고 그는 믿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봐야 "사랑=삶=또다시 사랑"이라는 그의 공식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사랑"이라는 말에 기가 질릴만도 하다. 그야말로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는, 사랑으로 버무려지고 범벅이 된 그런 삶을 깨달은 그가, 혹은 그런 세상을 꿈꾸는 그의 순수한 내면이 나는 부럽다. 동시에 그가 얻은 깨달음과는 너무나 다른 삭막한 세상에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두렵다. 노파심이다. 그가 찾아낸 존재의 의미는 사랑이며, 사랑의 의미는 구원이 아니었을까. 즉 사랑이 곧 그에게는 구원으로 파악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랑의 기원은 재론의 여지없이 오직 절대자라고 그는 확인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 절대자가 아니면 존재의 의미도 사랑의 의미도 없을 뿐더러 이룰 수도 없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절대자는 비로소 절대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위한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시가 관념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나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 혹 본인은 부인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오감이 한정된 공간만을 체험할 수 있도록 그의 장애가 그를 구속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라, 나 자신의 신랄한 경험이기 때문에 확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데, 이 한계는 생각보다 커서, 구체적인 현장 경험으로부터 비롯되는 구체적/사물적/경험적인 언어가 아니라, 관념적/선험적/추상적인 언어로써 시를 채우도록 만드는 것이다. 물론 그의 시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여건이 관념적인 경향을 강화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며, 김성진의 시 세계를 이해하려는 독자는 그것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그의 시를 읽을 때, 내가 좋아하는 감정적 평정을 그의 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의 시가 여느 시와 다르게 이미 혼란한 일상사를 초월하고 있기 때문이거나, 일단 한 차원 걸러져서 정갈하게 전해져 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글·편지를 쓰는 것은 자신이 깨닫게 된 사실들이 중요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의 정갈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혼란한 일상.내면/신앙에 작은 감동/파문/변화를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깨달음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어하는 것이나(누구든 그러하겠지만), 그가 사랑을 준비하는, 또는 사랑이라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에게 편지/시를 쓰는 까닭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렇다. 김성진의 "사랑을 준비하는 이에게 쓰는" 편지는 그러므로 영혼들을 향한 그의 진지하고도 차분한, 그의 표현 그대로 하자면, 바로 그의 창조자를 닮아있는 그의 따뜻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나름대로 삶의 진실을 들여다본 자가 자신은 이미 거쳐온 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지금껏 헤매이는 자들을 연민과 안타까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띄우는 애정과 깨달음의 서신/조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전염시키고 확산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그의 기도와 편지, 시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그 나름의 한 방식으로써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존재와 사랑의 의미를 탐구하는, 한 이름 없는 시인의 편지와 기도의 의미이다. 사랑이 끝이 없음같이, "언제 끝날 지 모를/ 이 기나긴 편지를 쓰려 합니다."라고 고백했던 그의 편지가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존재와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한 그의 진지하고도 고단한 질문이 그만 멈춘 것일까? 이미 그는 찾을 것을 다 찾았다고 포만감에 젖어드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존재와 사랑에 대한 그의 열정이, 그만 끝도 모를 역경의 그늘에 가리어 차갑게 식어버린 것일까? 그의 편지와 시작(詩作)이 멈춘 것만 같아서 나는 가슴이 아프다. 그러나 나는, 어둠 속에서 발견한 삶의 아름다움과 빛을 그가 놓치지 않고, 홀가분한 정신과 자세로, 외롭지만 끝까지 따라가리라는 확신으로 내 아픈 가슴을 쓰다듬는다. 그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도를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언젠가는 관념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냉엄한 현실 인식 속에서 구체적으로 승화·극복된 그의 체험적 사랑의 시를, 그 극복의 노래를 듣게 될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그것을 간절히 기원하며, 부족하나마 이 글을 우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존경하는 나의 문우(文友) 김성진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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