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씀... 로마서 10장 17절.. 한글 킹제임스 성경..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
(KJV) King James Version.., So then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개역개정 성경..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아래에 적어놓은 그리스어는, 로마서 10장 17절의 헬라어 역본들로 적은 문장이다. Stephens 1550 Textus Receptus... αρα η πιστιζ εξ ακοηζ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ζ 'θεου'
Scrivener 1894 Textus Receptus... (αρα η πιστιζ εξ ακοηζ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ζ 'θεου
Byzantine Majority... αρα η πιστιζ εξ ακοηζ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ζ 'θεου'
Alexandrian... αρα η πιστιζ εξ ακοηζ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ζ 'χριστου'
Hort and Westcott... αρα η πιστιζ εξ ακοηζ η δε ακοη δια ρηματοζ 'χριστου' ----------------- 위에 이상하게 보이는 글자들은 다섯가지의 헬라어 역본으로 본 로마서 10장 17절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위에 세 종류의 역본과 아래 두 종류의 역본이 끝에 낱말이 다르다.. 위에 세개는 소유격이 "하나님의"를 뜻하는 "떼우(θεου)"라는 낱말이고, 아래 두개는 소유격이 "그리스도의"를 뜻하는 "크리스투(χριστου)"이다.. 즉, KJV와 개역개정의 차이다. 저 다섯가지 역본중에 가장 오래된 역본은 위에 세가지 안디욱 비잔틴 맛소라에 속한 역본들이다. 나머지 두가지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필사본에 속한 역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두가지다.. 우선 로마서 10장 자체는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설명하기 위한 내용이다. 따라서 21절까지를 한 문맥으로 봐야한다. 첫째, 구약이건 신약이건 아무리 직역 성경이라 해도, 어떤 역본을 통해 번역을 했느냐이다. 이것을 따지지 않으면, 해석이 달라져 버리기에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말씀".. 과연 어느것이 맞는 번역일까.? 사도바울은 8절에서 신명기 30장 14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 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문맥을 통해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 번역이고, 마태 4장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은 떡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도 "내가 하는 말은 내것을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께 들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로마서 10장 1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번역했어야 맞는다 본다. 둘째, 사도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대체 누구에 의해 나오는 것이냐 이다. 저 17절의 뜻을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서 그것을 내가 인정하는 그것을 믿음이라 부를 수 있을까? 분명히 해둬야 할 일은, 히브리적 믿음과 헬라철학적 믿음은 분명코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따라가야 할 믿음은 히브리적 믿음이다. 전에도 이미 말했지만, 이것은 결코 어떤 관념과 개념 또는 지식을 내것으로 수용하고 인정하는 헬라철학적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적 믿음은 자기 부인과 죽음으로부터 시작되어진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자기 부인과 죽음으로 하나님을 따랐다. 이것이 히브리적 믿음의 모태가 됐다. 그렇다면, 히브리인이며 동시에 바리세인인 사도바울이 다른 믿음을 말했겠는가.?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오는 믿음은 결코 개념적 지식에 대한 단순한 인정을 말하는게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지식에서 나온 믿음은,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아는 지식의 믿음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같은 로마서 13장에 해답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의의 완성, 곧 그 분의 법 그 자체는 사랑이며, 완성과 목적 또한 사랑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바울은 같은 로마서 3장 22절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음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음이 아니다. 또한. 10장 8절에서 신명기 30장 14절을 인용한다. 즉, '그 말씀은 네게 아주 가까워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이다. 신명기에 저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체계적으로 정리를 하면서, “너희가 지켜야할 계명은 이것이니 다른데서 찾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 바로 저 구절이다. 그런데 바울은 저 구절을 인용하며, '그것은 우리가 전하는 믿음의 말씀이다.'라고 한다. 그러고 나서 17절에서 아래의 말을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라고.. 그러나 정확히 표현하면, 나오다, 라는 동사는 헬라어 필사본 원문에는 없다. 다시 말해 "믿음은 들리는 것.. 그리고 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다. 즉, “진짜 믿음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다“로 보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반드시 소유해야 할 믿음에 대한 다른 개념을 발견하게 되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의 개념이 우리가 의식하고 생각하는 관념적 신뢰나 사고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는 누구신가.? 말씀이다. 또한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믿음, 곧 헬라어의 단어의 뜻 그대로 표현하면 "신실"이다. 그리고 그 믿음(신실)은 예수의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소유해야 할 그 믿음(신실)은 무엇인가.? 예수다.! 다시말해, 믿음(신실)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로 죽은 시체인 내 속에 예수가 살아 계시는 그것이며, 그 죽은 시체에 예수로 옷 입혀진 상태가 곧 믿음(신실)이다. 자아,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의지인가.? 유튜브에 어느 저명한 목회자의 말처럼,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믿음이어야 한다고 말한 그 말이 맞다면, 대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 할 것인가.? 그 목회자의 말을 빌려서,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은 자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진액을 받아서 나오는 열매이기에,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면서, 믿음 자체를 인간의 의지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그 진액은 곧 말씀인데, 말씀과 진액을 따로 본다는 말인가.? 또한, '그리스도를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는 말하면서도, 그것은 '예수처럼 믿는 것'이라고 하던데, 분명히 맞다. 예수처럼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말하면 이러한 논리적 모순이 생긴다. 즉, 우리가 예수님께 접붙임 받은 자로써 우리에게 나오는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진액 곧 말씀과 성령에 의해 나오는 것이기에, 인간의 의지일 수 없다하면서도, 예수처럼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은 예수처럼 사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행위 자체는 말씀과 성령이고, 그걸 나타내는 능력이 인간의 믿음인가.? 그 모든 걸 예수님처럼 이타 주도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타낼 능력이 인간에겐 없기에 하나님이신 예수가 세상에 오신건데, 그 능력이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믿음이라 한다면, 논리적 모순 아닌가 말이다. 믿음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에, 그걸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가 심겨지는 그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내게 심겨진 이 믿음, 곧 예수를 선택하고 지켜야 할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나님께 있는가.? 아니, 이제 이걸 선택하고 지킬 책임은 내게 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사도바울의 말데로, 각각의 분량이 있다. 그러면 이 분량은 무엇이 기준일까.? 그것은 바로, 얼마나 내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로 죽어져 있느냐가 기준이고, 이것을 통해, 예수가 내게서 얼만큼 표출되고 있느냐.. 이것이 믿음이다. 또한 유튜브의 그 목회자의 말로, 에스겔서에서 마른뼈의 기사는 완전히 죽어버린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한다. 맞다, 그런데 이스라엘만 시체 상태인가.? 이방인인 우리는 시체 상태 아닌가.? 그런데 인간의 타락이 완전히 죽은 상태가 아니라, 반 죽어진 응답할 수 있는 상태라고.? 어느 부분 옳다. 분명히 타당한 주장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인간의 자유의지마저 소멸시켜 버렸다면, 결코 지옥으로 끌고 갈 조건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가 소멸 됐다면 사탄 자기의 책임만 남게 되기에 말이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의 의에 기준은 상대만을 위하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하나님의 사랑이 기준이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기준이고, 또한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그 믿음이다.. 인간이 이것을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 스스로 세상에 오신거 아닌가.? 단순하게 본을 보이기 위해 오셨다면, 예수를 메시아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셨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의 의지적 행위와 그 믿음으로는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그것이 상대만을 위하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하나님의 사랑이란 것이다. 하나님 앞에, 죄인 된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모든 행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위해서거나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그 이유이다. 그러면, 과연 그런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믿음을 하나님이 받으실까.? 자, 여기서 개념정리 바로 하자. 만약, 인간의 타락이 반죽은 상태이고, 그렇기에 자유 의지가 살아 있는 거 아니냐고 말한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나온 인간의 의지적 믿음이여야 한다고 말하면, 적어도 인간의 의지로 지옥은 면할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어야 한다. 그러나 결단코 그런 말씀 자체가 성경엔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부분이 있다. 의도와 동기와 목적과 뜻이 곧 의지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을 위한 구원이나 얻으려고 예수를 이용하는, 자기를 위한 자기 의지적 믿음을 놓고 하나님께서 의로 인정하실까..이다.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와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을 동일시해서 보면 안된다. 만약 사도바울이 이것을 동일시해서 봤다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인한 하나님의 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고,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안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이유는, 인간의 의지적 믿음은 인간인 내가 주체가 되기에, 예수를 그 믿음의 도구로 만드는 짓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의 공로적 율법이 되기 때문이다.
"율법의 행위"라는 말은, 결코 율법 자체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이다. 이런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행위는 결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 반복하지만, 자애(自愛)로 타락한 인간의 의지적 신념으로 예수처럼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의가 될 수 없다. 왜냐면, 인간의 그 신념 자체가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져 내가 부인되어지고, 그 자리에 예수께서 임하셔서 사셔야 하는 이유이다. 저 17절을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에 반응으로 관념적 인정이나, 지식을 내 것으로 수용하는 것을 믿음이다. 라고만 말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애적 목적으로 자기 의지로 갖는 세상에 우상들을 믿는 그 믿음과 뭐가 다른가.?
바로 이러한 믿음이 가인의 믿음이다. 가인이란 이름의 뜻 속의 인간의 이러한 의식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저 단어를 히브리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내가 여호와와 함께 남자를 창조했다.”라는 뜻이다.
저 이름의 뜻은 사람인 하와의 편에서 보면, 굉장히 자신의 존재를 극대화시킨 긍정적 표현이고, 또한, ‘저 선악과를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속인 사탄의 말을 믿었던 그 의식이 내포되어 있고, 어떻게든 내 힘으로 생명을 다시 얻겠다는 그 의도와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생각이 숨겨진 뜻임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저 이름의 뜻과 숨겨진 의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선 받아드려질 수 없는 것들이다.
히브리어는 단어 자체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는 상형문자이다. 글자 하나하나가 뜻이 들어 있기에 그 조합을 어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고 한 문장 속에 수많은 뜻을 헤아릴 수 있기에 사람의 자애(自愛)적 관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창세기 4장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통한 진짜 믿음과, 자기 자신을 위한 사탄의 사랑 곧 자애(自愛)로 말미암은 사람의 의지적 믿음이 서로 갈라져 대항하고 있음을 헤아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 속에 이런 의식과 관념이 모든 종교와 철학의 기본 틀이 되어오고 있음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것들 중에 하나가, 불교철학이고, 그것을 계승 받은 그것이 바로 헬라철학이고, 그것을 통해 의식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 현대 교회들이 믿음이라 부르고 있는 인간의 신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자기 형상과는 정 반대인, 자기 자신을 위한, 저런 믿음을 받으시고, 의로 인정해 주실까.? 절대로 아니다. 믿음은 관념적 인정도, 지식의 수용도 아니며, 또한 자애적 의도의 믿음은 결코 인정 안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믿음은 내 삶으로의 태도며, 관계며, 또한 이것은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이다. 내가 믿는다 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영적 교만에 빠져있다. 그 믿음으로 잣대질을 하고 함부로 평가하고, 이게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믿음이다. 아니 믿음이라 믿고 있는 것뿐이다. 사도바울은 왜, 그리스도의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고, 로마서 10장 8절 에서 신명기에 저 구절을 인용해야 했을까.? 혹시 인간의 거짓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인 진짜 믿음을 구분하기 위함은 아닐까.? 사도요한의 말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이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믿음을 말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곧 믿음의 본체라는 뜻을 말한다. 그러면, 여기에 인간의 의지에 믿음이라 말할만한 뭐가 있는가.? 원문에서 표현된 믿음의 의지적 수동태는 하나님의 말씀인 그 믿음을 내 의지로 선택하고 지키는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이 말씀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으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정말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다면, 내 믿음이라고 교만할 수 있는가.? 히브리적 믿음을 소유하는 나와 우리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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