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그리 멀지 않은듯 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예수의 사람들을 그의 말씀의 진리로 하나둘씩 불러 모으시고, 온전케 하시려는 그 일들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요 몇년 사이, 온전한 삶의 변화도 없이, 무조건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고, 가르치고 말하는 예정론의 칼빈주의와, 하나님과 인간의 협동으로 일어나는 인간의 의지에서 나온 행위로 천국 간다고, 가르치고 말하는 알미니안주의가, 또다시 서로 대립하고 있는 형극을 보고 있다. 양쪽 다 성경을 들어서 말 한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한가지 묻고 싶다.. 과연..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사도바울의 말대로, "예수와 함께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혔는지. 그래서 내가 아닌 자신안에 예수가 사시는지"를 말이다.. 또한, 정말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자기의 모든것이 부인 되어져서, 더이상 내 속에 내가 없고, 그래서 내 안에 예수만 사신다면, 그 믿음이, 그 행위가, 과연, 내 힘과 내 의지로 소유한 것으로 여기고, 내게서 나온 것이라 말하고,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믿음을 말하는 칼빈주의쪽에서도, 에베소서 2장 8절을 들면서, 말로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지만, 그 깊은 의식을 들여다 보면, 인간인 내 의지가 주체가 된 믿음을 말하는 것을 본다.. 적극적이지 못하고, 망설이고, 시키는데로 안하는 이들을 향해, 믿음이 없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들을 보면, 인간의 의지가 주체가 된 믿음을 강요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로 믿었다면 결코 저런식의 평가는 안할 것이다 이 말이다. 왜냐, 문자 그대로 선물은 내가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지, 내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를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쪽에서도, 성령의 도우심과 그 역사는 말하면서도, 인간인 내 의지가 주체가 된 행위를 강요하고, 칼빈주의의 믿음만으로를 비판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양쪽 다.. 공통적인 부분이 있다.. 그 믿음과, 그 행위의 동기와 목적이 다른 무엇도 아닌, '나의 구원'이 동기와 목적이다. 믿음도, 행위도, 그 동기와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일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또한 과연 성경이 그런 동기와 목적의 믿음과 행위를 말하고 있을까. 전에도 말했지만, 양쪽 다 틀렸다.. 왜냐, 구원은 동기나 목적이 아닌, 내게 들려지는 예수 복음의 말씀과 그 사랑을, 나의 모든것을 부인하고 십자가의 못박아 버리는 그 결단으로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에베소서 2장 8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쟌틴 헬라어, 원어 성경을 통해 저 구절의 문법을 보면, '선물'의 주어는 믿음이 아니라, 은혜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이 선물이 아니라 구원이 선물이라 이 말이다. 그러면, 믿음은 인간의 의지에서 나오는가. 아니, 절대로 아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로 나타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먼저 선포되고, 들려지는 그 곳에, 그것을 질리와 참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이들에게 임하는 역사가, 믿음이란 형태로 인간에게 나타나기에, 결코 인간인 내게서 나온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믿음으로", 라는 말도, 우리나라 성경들이 칼빈주의적 교리만 생각해서 원문을 무시하고 번역을 해놓은 탓에, 잘못 알아듣게 만들어놨다는 사실이다.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이 말하는 진짜 '믿음으로'의 주체는 아주 정확히 동일하다.. 즉, 믿음의 주체는 내게서 나온 의지적 신념이나 신뢰가 아니다. 그것은 곧, "예수의 믿음으로" 이다. '예수를 믿음으로'가 아니다 이 말이다. 우리의 성경들을 통해 바울서신에서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라고 표현한 모든 구절들이 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목적격 조사가 아니라, 소유격 조사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아들)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예수(아들)의 믿음으로"이다, 이 말이다. 이 말을 잘못 알아들으면, '예수께서 우리가 구원될 것을 믿으시고, 그 분의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냐'로 알아들을 수 있다. 허나, 결코 그런 차원이 아니다. 13년전에 내 홈페이지에서 어느 자매에게 말했었고, 지금까지 내 글들을 통해 계속 말했듯이.. 사랑도.. 믿음도.. 내게서 난 것이 아닌, 예수께서 성령으로 내 속에서 사랑과 믿음이 되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예수께서 우리의 믿음이 되셔서 믿게하시는 믿음.. 우리의 사랑이 되셔서 사랑하게 하시는 사랑이다.. 그럴 수 밖에 없고, 그래야 하는 이유는, 두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그 사랑과 믿음은, 결코 하나님 앞에 거룩함과 온전함으로 보여드릴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동기와 목적이 타락의 속성에서 나온 자기를 위한 의도이기 때문이다.. 둘째.. 성경을 통해 보면, 죽어 있는 자는, 살아 있는 자의 사랑의 믿음을 소유할 기회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에, 사랑의 믿음에 대한 소유와, 비소유가, 좋든 나쁘든 어떤 결과로든 그것이, 그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나타난 실체이기에 말이다. 또한 죽어있는 자의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실 수 없고, 받으실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바울의 고백 그대로,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의 못박혀 죽었고, 그래서 내 속에 예수만이 사신다면, 그 사랑의 믿음은 누구의 믿음인가. 내 믿음인가. 예수의 믿음인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안디옥 비잔틴 헬라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한 영문 KJV 성경으로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KJV 갈라디아서 2장 20절, "I am crucified with Christ: neverthless I live; yet not I, but Christ liveth in me: and the life which I now live in the flesh,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who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중 하반절을 주목하자.. "I live by the faith of the Son of God,".. 이 문장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산다" 이다. 다시말해, 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런데 살아 있다.. 그 이유는 나는 죽었지만, 예수가 내 안에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죽었기에 내 믿음이 아닌, 예수의 믿음으로 산다 이 말이다. 영문 킹제임스 성경에는 전부다 저렇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오 모 목사가 번역해 놓은, 한글 킹제임스 성경도, 칼빈주의의 교리 때문에 자의적으로 개역판과 맞추기 위해 오역을 했다고 봐야 할것이다. 결코, 영문 KJV의 저 번역이 잘못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 예수님께서 수도없이 죽어야 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고,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에서 "성령으로 함께하여 내가 행할 것이며, 내가 한 말들을 성령으로 깨닫고 믿게 될것이다".. 하셨기 때문이고, 초대교회 본부였던 안디옥에서 사도들과 성도들에 의해, 필사되고 지켜져 왔던 성경이 정확하겠는가, 각종 이단과 우상숭배의 근거지었던, 이집트에서 필사 되어왔던 성경이 정확하겠는가를 생각해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비추시는 빛으로 내가 지금까지 말해왔던 사랑이 그러하듯이, 믿음도 결코 내게서 나와서 내가 소유한 내 믿음이어서는 안된다. 칼빈주의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면서도, 인간의 의지와 능력으로 나타내는 믿음을 강조하기에, 예수를, 나의 구원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인간인 내 믿음으로를 말하기에, 십자가 없는 믿음, 곧, 헛된 번영주의의 믿음과, 기복의 믿음과, 육신의 거짓 믿음을 낳게 했다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예수가 우리의 믿음이 되시지 않았기에, 사랑의 아무 열매도 없고,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이 없는, 그래서 구해도 얻지 못하는 가짜와 거짓 믿음으로 만들어 놨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행위를 강조하는 알미니안 주의도 매한가지다.. 그 행위에 능동적 주체가 예수가 아닌, 인간인 자신이 주체이기 때문이며, 또한, 그 행위를 나의 구원을 위한, 도구와 방법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게 과연, 자기 고행과, 수행과, 덕행으로 자기를 위해, 스스로 신이 되겠다는 세상 종교들과 뭐가 다른가. 그 믿음과 사랑의 행위를, 나를 위해, 내게서 나와서, 내가 소유하고, 내가 행하는, 내가 주체라 여기기에, 자기를 위해서, 예수 없는 거짓 믿음으로, 거짓 사랑을 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칼빈주의도, 알미니안 주의도, 예수가 없다.. 다시말해, 양쪽 다,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지 않았다, 이 말이다. 죽었다면 내가 믿는 것이겠는가, 죽었다면 내가 행하는 것이겠는가. 한글 킹제임스 성경, 갈라디아서.. 2장 16절,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함이라.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내가 이제 육신으로 사는 삶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3장 22절,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 있다고 단정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려는 것이라. 3장 26절,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5장 5절, 이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소망을 기다림이라... 에베소서.. 2장 8절,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3장 12절, 그 안에서 우리가 그 분을 믿음으로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느니라... 빌립보서.. 3장 9절, 또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함이니, 나의 의는 율법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니, 곧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의라... 디모데후서.. 3장 15절, 또 어릴 때부터 네가 성경을 알았으니, 그 성경은 너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지혜롭게 할 수 있느니라... 저 구절들이 다, 비잔틴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예수의 믿음이다..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믿음은, 내게서 나온 내 신념이 아니다.. 내 믿음이 되신 예수의 믿음이다.. 명심하자. 사랑도, 믿음도, 인간인 내가, 주체가 되면, 예수는 함께 하시지 않는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 요한계시록 14장 9절~13절..] 셋째 천사가 그들을 따라가며 큰 음성으로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표를 자기 이마나 손에 받는다면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혼합하지 않고 부은 것이니라.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 양의 임재 가운데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 무궁토록 올라가리라. 그 짐승과 그 형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으며 여기에 하나님의 계명들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고 하더라. 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음성을 들었는데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록하라,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니라. 이는 실로 그들은 자기들의 수고를 그치고 쉴 것이요 그들의 행위가 그들을 따를 것임이라."고 하시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자기를 부인한 그 만이, 예수의 사랑을, 예수의 믿음을, 지킬 수 있다... 그것은 결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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