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람에겐 근본적으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은 어떤 물리적 실체로부터 느끼는 두려움이 아닌, 타락한 자아적 본성이 느끼는 영혼의 두려움이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사람은 자기의 자기 됨을 알기에 그것과 반대되는 자신을 보기에 느끼는 두려움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타락 이후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그로 인해 거짓(자애)으로 형성된 자아에 대해. 진리와 참이신 하나님 앞에 느끼는 이중적 고통과 이중적 두려움이다. 하나님은 누군가 사람에게 자신을 들어내어 보이실 때, 반드시 그에게 첫마디를 하신다..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오늘 이 글은, 나 개인적으로 힘겹고 무겁고 어려운 마음으로 쓰는 글이 될 것 같다. 내 안에서 수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에 맴을 돌고 있고, 정신창란증과 같이 한꺼번에 밀려 나오려 하기 때문이고, 그것들 중에, 하나님의 것을 골라내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글을 더 이어가기 전에,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말씀을 현대어성경으로 적어 놓는다..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나 환히 비춰라' 하고 명령하시자 빛이 생겨나 환히 비추었다. 하나님은 빛이 환하게 비추는 것을 바라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눈 뒤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저녁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어 하루가 흘러갔다. 첫째 날이 지난 것이다. (현대어성경 창세기 1장 3절~5절) 천지가 창조되기 전, 아무 것도 존재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분은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으며 그분이 만드시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모든 인류에게 빛을 주신다. 그분의 생명은 어둠 속에서 비추는 빛이시며 어둠이 결코 그 빛을 끌 수가 없다. 그가 온 후에 참빛이 세상에 들어왔다. 이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이다. 그분이 세상을 만드셨는데 그분이 오셨을 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현대어성경 요한복음 1장 1절~5절, 9절~10절) 우리가 성경을 깊히 읽어가면 갈수록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경륜은 창조 당시로의 사람의 회복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든 율법(십계명)은 바로 그 사람 회복의 한 부분으로 사용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간에게 주신 모든 계명은 사람을 위해, 하나님 스스로도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이며, 그 계명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해주는 표징이며, 자기 됨의 정체성이며 그것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예수) 자신도 스스로 그 계명에서 벗어나거나 제외시키지 않으시고 자신이 먼저 그 계명을 지키신다.
하나님 자신도 그 계명을 지키고 계신다는 증거의 말씀은 아래와 같다. "내가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쓴 책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현대어성경 마태복음 5장 17절)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현대어성경 요한복음 13장 34절)"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저 말씀을 로마서에서 아래와 같이 우리들에게 더 확실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여러분이 남에게 진 빚은 다 갚으십시오. 그러나 언제까지라도 사랑의 빚은 다 갚을 수 없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그분의 요구를 다 채워 드리는 일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듯 한다면 남에게 손상을 입히거나 속여 빼앗거나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남의 아내를 범하거나 남의 것을 탐내거나 그 밖에 십계명에서 금지 된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입니다. 십계명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그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채우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러분에게 필요한 단 하나의 율법입니다. (현대어성경 로마서 13장 8절~10절)"
얼마전, 다시 올린 음악의 댓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사랑을.. 사람을 통해 완성하시고자 원하시지만, 타락한 인간의 자애(自愛)의 속성으론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는 불가능 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하고 부인하려 들겠지만 그것이 사실이다.. 사도바울이 성경에서 말 한 것처럼, 율법의 완성이 사랑이라 한 말씀을 알고,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안다면,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 없기에, 하나님 스스로 완성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라고..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타락 직후부터 사람에게는 한가지 심리적 특징이 생겨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두려움"... 대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세기 3장 9절~10절)
많은 신학자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신학을 완전히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신/구약 성경을 비교해가며 설명을 하려한다. 위에 구절에는 단순하게 자신의 벗은 몸을 인식하므로 인해서 두려움이 생긴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선악과란 무엇이며, 그것을 먹기 전에도 분명히 자신의 몸에 어떠한 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걸 인식하고 있었을텐데, 그것을 먹음으로 자신(자기를)의 벗은 것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선악과, 발가벗음, 두려움... 이 세 단어의 연결 고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리고 정말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은, 스무네살 때, 오직 사랑만으로 내게 회개를 이루게 하신 그 때, 내가 가졌던 질문이었기도 하다..
플라톤과 니체를 신봉하는 현대 철학자들은 '인간이 소유한 죄로 인한 두려움은 허상이고, 죄 자체가 없는 것이다'. 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 말은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철학을 모순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말이다. 동양철학이건 서양철학이건 철학의 근원적 시발점은 자기 자신이다. 곧 인간 스스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이 되겠다는 그것이 철학이기 때문이다. 철학에서 에로스가 빠지면 철학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자애(自愛)이기 때문이다. 모든 철학이 바로 이 에로스(자애)로 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부터 에로스 곧 자애는 거짓이요 그것 자체가 자멸하는 죄다. 라고 선언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6절~17절)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세기 3장 1절~5절)
어떤 이들은, 위에 구절로 어떻게 자애를 죄라 하쎴다 라고 해석할 수 있느냐?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런데, 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절과 사탄이 말하는 구절을 비교해 보면, 공통적으로 인간의 근원적 속성이 무엇이며 어떤 존재라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내포되어 나온다. 그 문맥은 바로, 2장 17절 "선악을 알게 하는"과.. 3장 5절 "선악을 알 줄"..이다.. 즉, 사람은 처음부터 선악을 구분 할 수 있던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선한 존재로 창조하셨다면, 그리고 천사와 같이 선악을 구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면, 당연히 반대의 악을 인식하고 구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말은, 선악과를 먹으라 마라 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이미 선으로 반대의 악을 알고 있는데 말이다. 또한, 사탄의 저 거짓의 미혹에도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왜? 선으로 악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에 두 구절로 보면, 맹자의 성선설도, 순자의 성악설도, 그렇다고 동서양의 여러 철학자들이 말하는 성무선악설도 아니란 것이다.. 그렇다면, 선한 존재도 아니고, 악한 존재도 아니라면, 사람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장 26절~28절)
자, 바로 이 말슴의 그 해답이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즉, 인간은, 아니 사람은, 하나님을 그대로 닮은 하나님과 같은 속성의 존재란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근본 속성은 무엇인가? 공의.? 선(善).? 자비와 인자.?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을 나타내기 위한 그 안에 속해 있는 한 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형상이 공의와 선이라면, 그 형상을 닮은 사람도 공의와 선으로
악을 구분 할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선악을 구분 못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은 공의와 선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성경에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근본적 속성을 단 한마디로 일축하고 있다. 요한1서 4장,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바로 이 사랑이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신 자기 정체성.. 또는 하나님의 형상.. 즉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사랑은 인간 창조의 원리와 질서속에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 바로 그 사랑 자체를 닮은 존재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것인가?... 우리는 반드시 이 질문을 해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닮은 나의 나 됨의 본질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대답은, 아래의 신구약 성경을 비교해야 얻을 수 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구약, 레위기 19장 18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신약, 요한복음 13장 34절)
구약(율법서 포함)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라 하신다. 그런데 저 신/구약 두 구절에 사랑이 같은 사랑으로 보이는가, 예수님께서 주신 명령으로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예수는 말슴 하신다. "새 개명을 너희에게 준다"..고, 왜.? 어째서 새 계명일까.? 언젠가 내 글을 통해 말했듯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본레의 뜻이거나 최고 절대 사랑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자애가 본성이 되어버린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감안하신 하나님의 양보와 배려의 말씀이란 것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구약에 이 말씀을 변형해서 신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가 되었다. 이 말씀이 구약성경의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율법과 계명의 기초며 핵심이다. 그런데.. 자애가 본성이 되어버린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감안해서 주신 저 계명 조차도.. 다시 말해, 다른 이를 자기처럼 사랑 하는것 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무능력함과 나약한 존재가 인간이란 것이다. 로마서에 사도바울의 논법데로, 하나님이 율법을 세상에 주셨던 이유는 그것을 지켜행하게 하실 목적이면서 동시에 또한 그것(자기처럼)조차 행할 수 없는 죄인 된 존재란 사실을 우리의 약함과 무능력으로 알게 하시려는 목적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예수) 자신이 세상에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유기도 한 것이다. 요한복음 13장34절, 예수님의 계명에는 '네 몸과 같이'가 없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이다.. 즉, 예수님의 사랑의 기준은, '자애(自愛)인 네 자신과 같이"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이신 무자애(無自愛)인 예수 자신의 사랑'이다.
바로, 예수 자신의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뜻이며, 또한 창조주이신 자신이 그 사랑으로 자신을 닮은 사람으로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뜻이다. 이 사랑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하셨고, 또한 지금 이 순간도 그 분 예수가 완성해 가고 계신다. 종전에 쓴 글로 반복해서 말하면, 그 사랑의 완성의 주최는 우리가 아니다. 예수 당신이시다. 사람을 위한 이 회복은, 하나님의 형상 곧 사랑으로 창조된 그 사랑의 존재로서의 사람의 회복이며, 상실에 대한 회복이다... 그래서 예수의 계명은, 구약에서 말씀하는 사랑과 전혀 차원이 다른 새 계명인 것이다. 위에 신/구약 두 구절만으로도 하나님의 사랑은, 에로스(자애)가 아니고, 또한 그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창세기 2장 16~17절은, 사랑에 정반대인 자애(自愛)는 거짓이요 스스로 자멸하는 죄라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된 말씀이란 사실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에로스(자애)를 따르는 철학이 '인간이 소유한 죄로 인한 두려움은 허상이고, 죄 자체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죄 그 자체인 에로스(자애)를 부인하는 것이며, 자기들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모순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한 저 말은, 스스로 에로스(자애)가 거짓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진짜요 진리임을 인정한 말이 아닌가 말이다. 자, 이제. 타락한 인간만이 느끼고, 인간만이 갖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의 이중적 고통과 이중적 두려움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었거나 발가벗음으로 인해서 소유케 된 고통이거나 두려움이 아니다. 진짜 사랑이신 하나님 앞에 거짓 사랑을 하게 된 자신을 느끼는 그것이 곧 인간위 고통이요 두려움이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똑바로 처다 볼 수 없고, 설사 보더라도 하나님의 진짜인 사랑의 빛이 비춰지면, 스스로 그 자리에서 소멸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간은 본성으로 알기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가 숨는다는 것이며, 이것이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요 의미인 것이다. 우리가, 자애(自愛)의 마지막 속성이 자멸이란 사실을 인식한다면 저 말씀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앞에 자신을 나타내어 보이실 때, 그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라고, 하나님(사랑)을 닮은 사랑의 존재는 자기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회복하시려는 사람의 진짜 모습이다.. 하나님께 있어서 선악을 구분하시는 방법은 바로 사랑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사랑)을 닮은 사랑의 존재인 사람에게 원하셨던 선악을 구분하고 아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으로 선악을 다 포용하길 원하셨다. 그것이, 하나님 자신의 형상 곧 사랑으로 존재케 한 사람의 자기됨의 정체성이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나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참인 사랑으로 선악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거짓인 자애(自愛)로 선악을 알게 되었다. 강조해 말하지만, 선의 근원은 사랑이고. 악의 근원은 자애(自愛)이다. 이 말의 의미를 알겠는가.? 사랑이 선에 속한것이 아니다. 선이 사랑의 속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랑이신 하나님이 선악을 구분하는 방법이며. 그것으로 하나님(예수) 자신도 우리를 위해 지키고 계신 율법과 십계명, 즉 사랑의 법을 허락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이 시간도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준 계명은 너희를 위해 내가 먼저 지키고 있고 그것을 완성하러 왔다. 그러므로 내 사랑안에 거하여 두려움을 갖지 말며. 내 사랑으로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래서.. 나는.. 예수 그 분이기에 비로서 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위해, 예수님 스스로 지키시는 계명.. 그리고 완성하신 계명.. 사랑.. 예수이기에... 이제.. 우리 모두.. 두려워 말고, 예수가 비추시는 그 사랑의 빛 안에 있자.. 그래서.. 나의 나 됨을 잃지 말자... 그리고 예수 그 분의 사랑으로 서로.. 서로.. 사랑하자... 그 사랑으로 그 분이.. 나와 당신에게 착한 일을 시작하시게 하자...
------------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 17:26,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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