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편 1편으로 다시 보는 산상수훈(팔복) ***
..대조할 말씀..
[KJV 성경, 구약.. 시편, 제 1 편..]
(1) 악인들의 간계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2) 그의 즐거움이 주의 법에 있으니, 그가 주의 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강가에 심겨진 나무 같아서 계절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의 잎사귀는 마르지 아니하리니, 그가 무엇을 하든지 번성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하니,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은 의인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니
(6) 이는 의인들의 길은 주께서 아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기 때문이라.
[KJV 성경, 신약.. 마태복음, 5장 3절~20절..]
(3)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굶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자비로운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자비를 얻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순결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리울 것임이요.
(10) 의로 인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꾸며, 갖은 악한 말로 너희를 거슬러 말할 때에,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크게 즐거워하라. 이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앞서 있었던 선지자들도 그들이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3) 너희는 땅의 소금이라. 그러나 그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쓸모없어진 소금은 밖에 내어버려져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성읍이 숨겨질 수 없느니라.
(15) 또 사람들이 촛불을 켜서, 곡식 되는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촛대 위에 두나니, 그러면 빛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비추느니라.
(16) 그러므로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의 선행을 보게 하고, 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서를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노라.
(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범하고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 불리울 것이요, 누구든지 계명들을 행하고 가르치는 사람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라 불리울 것이라.
(20)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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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오늘 이 글도 많이 길어질 것으로 예상해 본다. 따라서 집필 시간이 며칠이 걸릴지는 나도 모르겠다.]
우선, 이 글은.. 요전에 쓴, "예수의 사랑은, 처음 시작, 바로 그 사랑", 이란 제목의 글에 연장으로 맥을 같이 하기에, 좀더 깊이 묵상하려 하기에, 반복되는 부분과 보충되는 부분이 있음을 밝혀 놓는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경에서 수도없이,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따라야 하며, 내가 택해서 나를 따르는 너희는 스승인 나를, 즉, 나를 닮은 나의 제자인 너희는, 나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고, 죽임까지 당할 것이다" ..라고 하신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자기들 교회의 교인들 수가 줄어들까봐, 또한 헌금의 주체인 교인들의 비유 거스리지 않으려고, 이런 얘기조차 안하려 들고 있고, 그래도 조금은 깨어 있는 일부 목회자들은 여기까지라도 얘기를 하는 이들이 있다.
허나, 여기까지 얘기를 하더라도, 세상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미워하는 근본 이유와, 핍박하는 근본 이유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목회자가 설명을 못하고 있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적 문맥으로 깊이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과 의에 대한 기준이 무엇임을 충분히 알 수 있고, 그와 반대되는 불의와 죄가 무엇임을 분명히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한권, 한장, 한절로, 불리해서 보려 하기에, 못보고 있는건지.. 아니면, 사도바울의 신학을 잘못 해석했던, 어거스틴과 마틴루터에만 의존해서 만들어놓은, 이신칭의적, 교리만을 통해 보려하기에, 의식이 고립되어 있어서, 감도 못잡고 있는건지..
자기 스스로 신구약 성경 전체를 대조하여 연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그져 단순하게 목회자는 신학교에서 교리로 짜집기 한 것들만을 배워서 말하고, 교인들도 그 목사들의 말이 곧 성경인듯, 그져 표피적으로 단순하게 세상은 사탄에게 속하여서 죄로 타락되어 있고, 죗성에 사로잡혀 있기에, '생리적 태생이 틀려서 예수님과 그 분을 닮고, 그 분을 따라가는 예수의 사람들을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핍박하고 거부하는 것이다.'라고만 말할 뿐,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의 타락이 무엇으로부터의 타락이며, 그것으로 무엇을 잃게 되었고, 진정한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그래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는 인간의 근본 죄와 그 기준이 무엇이며, 그 죄들이 무엇으로부터 기인되어 나오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고의적으로 안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저 모든것을 성경 그대로 말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자기 자신이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에, 안하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해둬야 할 문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구약에 모세오경과 선지서들과 시편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는 것이고,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는 구약을 통해, 지적하고 고쳐서 가르치셨고, 그렇게 가르치신 그것이 곧 산상수훈이며, 그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예수님 자신의 삶으로 나타내신 예수님의 새계명, 즉, 예수의 사랑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을 말하고 똑바로 가르치려면, 구약을 대조하여 죄가 무엇임을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들에게 똑바로 가르치기 전에 자기의 잘못된 부분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자신이 자유롭지 않기에 설명을 회피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의 진짜 사랑이 무엇이다 말하고 있고, 그 기준으로 죄가 무엇이다 말하고 있는 나는 자유로운가... 아니.. 결코 나도 자유로울 수 없고, 자유롭지 않다. 왜냐면, 내가 말하는 이 모든 것은, 결코 내게서 나온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성령의 인도로, 예수의 그 사랑의 기준으로 1차적으로 나를 보고 말하고 있기에, 그로 인해, 내게는, 내 자신에 대한 비통함과 탄식이 있기 때문이다.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는 얘기지만, 나는 이 글을 통해서 나의 지난 일들과 집안얘기를 잠깐 얘기하려 했다. 그 얘기를 하려 했던 이유는, 모든이들의 나에 대한 그릇된 억측들을 막고,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와 예수의 사랑만을 들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길어지고, 주제에서 너무 벗어나는 듯 하고, 또 이미 그 내용만 따로 동영상과 글로 내 홈페이지와 유튜브를 통해 올려놨기에 이 글에서 빼려 한다.
그 내용을 알고 싶다면, 이 동영상에 연결 된 링크를 클릭하면 바로 볼수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사도바울의 논법데로, 예수의 사랑을 말하고, 그 진리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내가 그것을 삶으로 그대로 행하는 것과는, 분명코 다르고, 구분되어져야 하기에, 결단코, 전하는 것 자체만으로, 내 속에 예수의 그 온전한 사랑의 형상이 이루어졌다고 하거나, 말로만 전하는 행위를 가지고 구원의 확증을 소유했다고 말할 수 없기에, 내 육체를 벗어나는 순간까지 이루어야 할 거룩한 일임을 깨달아야 한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착각하고 오인하고 있다.
크게는, 목사가 되면, 신학교에 가면, 그 일 자체를 사명이란 이름의 가면으로 덧씌워서 그것을 감당하면, 자기 구원은 이미 끝났고, 이후에는 상급 뿐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고, 작게는,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와 같이 직분을 받고, 교회에서 맡긴 일만 잘하면, 주의 일이라 생각하고, 진짜 내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고, 예수를 전하는 전도가 아닌, 그저 자기 교회에 머릿수 채우려고, 자기 교회 나오라고 말하고, 예수가 아닌, 교회와 담임목사를 전하면서, 내가 할 일은 끝났고, 그 일 자체를 내가 구원 받았다는 증거이다, 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다.
말 그대로, 이것은 참으로 크나큰 오인이고 착각이다.
사도바울은 분명코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한 이후에, 도리여 내가 버려질까 두렵다,"라고, 바울이,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함번쯤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심각한 말이다. 그 원인은, 바로, 상대를 위하는 예수의 그 사랑이 빠져버린 모든 은사들은 헛것이다. 라는 뜻을 말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선과 공의는, 상대를 위한 사랑으로 행하고 나타나야 하나님께서 참되다 인정하시듯, 은사의 사용도, 사명의 준행도, 상대를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사랑으로 사용되고, 준행될 때 만이, 그 은사와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자아애(自愛)의, 죄의 속성을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그 사랑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끝까지 유지해 가기 힘들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작은 다른이들을 위하는 사랑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고, 그 일 자체에 대한 의무와 책임만 남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바울은, 수십년 복음을 전하다가, 어느날 자기 자신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상대를 위한 사랑은 없고, 단지 의무와 책임만 남아, 그 일을 감당하고 있는 자신을 말이다. 바로 오늘날, 그 사명과 은사를 자기 자신을 위한, 복락과 안위와 구원의 도구라고 여기고, 전락시켜서, 사명과 은사들의, 진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인, 예수의 사랑은 잃어버린, 목사들과 선교사들처럼 말이다.
허나, 바울이 그들과 다른것은, 자기 자신을 자각했다는 점이다.
자각하지 못하는 목사들처럼, 자기가 속한 상황과 여건으로 자신을 변명하거나 정당화 하지도 않았고, 그 상황과 여건으로 안주하려 하지않고, 끝까지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로마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쓴 서신,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예수로 인해서 고난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바울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말고, 너도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디모데에게 유언을 한다. 이러한 바울의 유언을 통해서, 얼마나 치열하게, 자신의 자아를 죽이며, 평생을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 이제..
시편 1편과, 산상수훈의 서두인 마태복음 5장을 대조하며,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복이 무엇이며,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죽어진, 진정한 믿음으로의 삶이 무엇이며, 예수님의 제자됨이 무엇임을, 지난번에 언급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며, 좀 더 깊이 묵상하고자 한다.
시편1편과, 마태복음 5장 3절~11절 까지의 말씀은, 원어 성경으로 보면, 같은 문체와,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신구약에 이 두 본문을 대조해 보면,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 유대 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장 쉽게 암송하고 있었을 시편1편과, 같은 어조와, 같은 서두로, 1편 기자가 경험했던 사실을 바탕으로 그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영감의 뜻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설명하시기 위해, 시편1편과 같은 서두와 어조로, 산상수훈의 서두를 시작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헬라어, 원어 성경에는 마태복음 5장의 팔 복은, 시편1편과 같은 시어적 감탄사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편에서는, "복 되도다. 악인의 소원의 동참하지 않는 이여..".. 라고 서술하고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복 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이여..".. 라고 말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양쪽의 내용과 문맥을 들여다 봐도 같은 방향을 향해, 가라고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복', 곧, '의롭고 신실한 복'에 대한 방향이다.
지금, 이 글을 통해서, 그동안 집필을 잠시 멈추고 있었던, 산상수훈에 대한 글을, 계속 이어가는 시발점이 될듯 싶지만, 전에 나는 산상수훈의 서두인 팔복의 뜻을, 요한복음 13장에 예수님의 새 계명을 중심으로 재 해석을 하며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그 부분을 다시 복습하며, 다음을 말하고자 한다.
-------- (마태복음 5장 팔복 설명 시작) --------
산상수훈은, 하나님께 어찌하라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제자로써, 내가 만나고, 대해야 할,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하라는, 사람을 위한 사람수훈이기에,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제시하신, 각각의 복의 조건사안들은, 저 말씀을 듣는, 한 개인의, 현 상황이거나, 처지를 소유한 자를 의미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을, 그들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기 위한, 이러한 조건의 사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지라는 의미로 봐야 한다.
그래야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도 어우러질 뿐더러, 저 여덟개의 구절은, 각각 동떨어진 독립된 구절이 아니라, 상호 서로 이어받는 구절로써, 우리를 위해, 완성하신, 예수의 그 사랑이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는 방법에 대한, 설명의 서두며, 동시에 결론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팔복에서 제시하신, 저 조건사안들은, 바로, 예수의 본질적 성품과, 그의 형상으로, 타락 이전의 모습을 회복한 사람의 모습이며, 제자됨의 모습임을 발견할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저 여덟개의 각 구절의 귀결 부분인..
"천국을 소유, / 위로를 받음, / 땅을 얻음, / 배부름, / 긍휼을 입음, / 하나님을 봄, / 하나님 아들로 불리움.."
이것들 자체는, 저런 삶을 사는 이에게, 따라와 주어지는 필연적 결과이지, 결코, 목적이거나, 한사람 개인에게 주어지는 복이라 해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 여덟 구절의 귀결점은,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던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과, 현재, 우리들이 보편적 의식으로 갖고 있는, 복에 대한, 기준과 관념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즉, 저 귀결점을 소유한 사람이 복의 사람이라고 여기는것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복에 대한, 기준과, 관념과, 개념을, 완전히 뒤집으신다...
저 팔복의 조건을,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 요한복음 13장 34절의 예수의 계명, 곧, 예수의 사랑을 통해, 다시 재해석 해서 바라봐야 할 이유는, 저 팔복만을 따로 봤을 경우, 기존 해석으로 풀이 해볼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리할 경우..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과는 맥이 끊어져 버리고, 전혀 무관한 구절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는 짓이기에, 올바른 관점의 해석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이라면, 그들도, 사람이기에, 이전이나 현재 인간으로써, 가난과, 슬픔과, 낮아짐과, 배고픔과 목마름과, 긍휼에 대한 바램을, 이미 느끼고, 경험하고,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비록 현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라 하더라도, 나를 위한 예수의 사랑이, 내 모든것에 충족이 되어서, 복이 되어 주셨기에, 인생관과, 세계관과, 가치관이 변화됨을 통해, 이 모든것에 대한 의미가, 내게 불행의 영향을 주기 위한 조건이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타애(他愛)를 위한 조건으로 바껴서, 자유로와지고, 복을 누리는 상태이므로, 더이상 자신이 누리기 위한, 복의 조건을, 소유할 필요도 만들 필요도 없다, 이 말이다....
만약, 목회자이든, 교회직분자이든, 평신도이든, 우리가 아직도 저런것을, 계속 구하고, 저기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와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예수를 만나지도 못했을 뿐더러, 예수가 누구신지 아직 모르고 있는 사람이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아닌, 예수를 우상으로 만들고, 이용해서, 속된 말로, 상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러 따라다니는, 들 고양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저 팔복의 조건은 현재 내가 처한 삶의 상황과 처지를 말하는게 아니라, 아래와 같이, 다른이들에게, 이러한 복의 사람이, 되어주라는 뜻으로 바라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즉,
(1) 심령이 가난한 자에 복,
(2) 애통하는 자에 복,
(3) 온유한 자에 복,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복,
(5) 긍휼히 여기는 자에 복,
(6) 마음이 청결한 자에 복,
(7) 화평케 하는 자에 복,
(8) 의이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에 복..
예수님은, 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저 여덟개의 각 구절들을 아주 치밀하게 연계시키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번째. 3절의 뜻..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 주어라..
자기를 부인하므로 마음을 비워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할, 목적과 이유는, 자아애(自愛)가 없는 진짜 사랑이신 예수가 내안에 임하셔서, 저들을 위해 저들을, 내게 사랑하게 하시도록 하기 위함이며, 다른이들의 마음과, 입장과, 생각과, 처지와, 사정을, 내안에 계신 예수의 가슴으로, 헤아려 줄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함이며, 이것이 곧 예수의 제자로써, 그분의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면, 자아애(自愛)가 없는, 예수의 사랑의 그 가슴만이, 다른 이의 마음과, 의식과, 생각을, 내안에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4절의 뜻..
그렇게 예수가 내안에 계시면, 다른이의 고통과, 힘겨움을, 내 몸에 한부분으로, 함께 애통하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수 있다.
애통하는 자가 되어줄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의 오감과 경험과 지식과 판단으로는 다른이의 아픔과 힘겨움을 결코 알 수 없지만, 오직 부인되어져 비워진 내 속에, 자애(自愛)가 없으신, 예수가 함께 하시므로, 자기를 온전히 버리신, 예수의 저이를 위한 그 사랑의 가슴으로.. 울고 있는 그를 위해, 그의 가슴이 되어 같이 울어 주고, 아파하는 그가 되어, 어루만져 주고, 힘겨워하는 그가 되어, 그의 짐을 같이 져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 5절의 뜻..
그렇게 하려면, 그의 아픔과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낮아진 온유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 주어야 한다.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할 목적과 이유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멀리 서서, 동정의 눈물이나 흘리는 것이, 상대의 아픔과 힘겨움을 헤아려 주고, 느끼고, 알고, 같이 울어주는 것이라 생각하거나, 거기서 끝내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의 삶속으로 낮아져 들어가서 그와 같은 동질성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럴때만이 그의 아픔과 고통과 힘겨움을 헤아리고 느끼고 함께 애통한다는 것을 상대에게 알게 해주고, 느끼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나는 그와 같은 자리로, 낮아진 온유한 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 예수가 나를 위해, 그리 하시려고 온유한자가 되셨듯이 말이다..
네번째. 6절의 뜻..
그럴때만이, 그를 위한, 아름답고, 옳은 길을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수 있다.
진정 상대를 위한다면, 결코 상대에게 무조건 내어주지 않는다. 상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물어서 찾아 보고, 상대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려하되, 무엇이, 또, 어떤 방법이..그를 위해, 가장 아름답고, 가장 좋은 사랑인지를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한다. 이것이 나를 위해, 하나님이신 예수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신 이유이다.
다섯번째. 7절의 뜻..
그리되면, 그에게도 사랑과 의를 이루도록 해주려고, 창자가 들끓는 고통의 긍휼을 소유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것이다..
예수의 사랑안에 있는 제자라면, 상대를 위해, 가장 아름답고 좋은 사랑을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다가 깨닫게 된다. 그의 아픔과 고통과 힘겨움의 이유는, 인간이 가진, 자신을 사랑하는, 자아애(自愛)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죄가 원인이기에, 비록, 내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가 내게 그리하게 하셨듯이, 나도 그에게 안타까움과 긍휼의 고통으로, 다른 누군가를 위해, 상대를 위한 사랑을 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 사랑과 의를 이루도록 돕는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말이다.
여섯번째. 8절의 뜻..
그렇게 되려면, 그를 위한, 내 모든 의도와, 목적이, 변질되지 않토록, 내 잠재의식까지 청결한 자가 되는, 복이 되어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간의 자아애(自愛)로 인한, 죄의 특성을 아신다. 인간은 죽기전까지는 언제든 변질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말씀하신다. "저이를 위한, 너희 모든 목적과, 의도와, 의식이 변질되지 않토록, 마음을 청결하게 하라." 라고, 훗날, 예수님은 나에게 물으실 것이다. 너는 누구를 위해, 그것을 했느냐, 상대를 위해서냐, 너 자신을 위해서냐, 라고 말이다..
일곱번째. 9절의 뜻..
이 모든것을 이룰 때, 그를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어 그를 평안케 하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줄 수 있다.
이 모든것이, 그를 위한 사랑으로 나타나서, 그로 하여금, 어떠한 거짓과, 조건도 없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도록 해야한다.. 동시에, 그 사랑의 평안이, 결코 인간의 것이 아닌, 예수의 것임을 알게하므로, 진짜 사랑이 무엇임을 깨닫게 해주어야 하며, 긍극적으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 하나됨의 평안을, 이루게 해주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이다.
여덟번째. 10절의 뜻..
이렇게 할 때, 바로, 이 모든것으로, 그를 위해 그를 사랑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의를 나타내어 보여주므로,, 세상에 사탄의 거짓 사랑을 들어내어,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되는, 복이 되어주는 것이다..
이 의는, 결코 내가 좋고, 내가 만족하고, 내게 이익이 되는.. 타락한 인간인 내 의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의이다. 그 진짜 의를 세상에 나타내어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사탄의 거짓 사랑 곧 자애(自愛)를 들어내어서 그것과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영적 싸움이다. 하나님의 진짜 사랑과 사탄의 거짓 사랑의 싸움.. 이 싸움은 분명코 내게는 고난이요, 손해요, 핍박이요, 죽음이 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이 싸움의 결과는 예수의 형상으로의 회복이며, 하나님과 같은 온전해짐이며,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영광이며,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길이다.
흔히들.. 아니, 사람이면, 누구나 다, 저 조건들을 피하고 벗어나야 복이라 생각한다. 구약 성경에도, 위와 같은 조건들을 결코 복이라 말한 흔적이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 모든것을 온전히 이루고, 통과하고, 거쳐와야, 천국을 소유하게 될 복이라 말씀하시고, 그 복을 소유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모욕과, 고난과, 죽임까지 당하게 될 것이라 하신다..
-------- (마태복음 5장 팔복 설명 끝) --------
그런데, 위에 복의 조건을. 굳이 구약 성경에서 찾으려 한다면, 시편 1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아, 지금부터 나는, 위에 내용에 덧붙여 조금씩 보충하며 오늘의 주제를 묵상하려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천국에서 천국으로 끝나는 마태복음 5장에 팔복에 관한 시어적 표현은, 10절로 끝나는듯 보인다. 그러나, 원어 성경에서는 11절 또한 시어적 표현으로써 한 문맥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위에 여덟개의 예수님의 복의 조건을 소유한 사람들은, 예수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모욕과 고난을 받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며, 그 조건을 소유한 사람은, 최종적으로 또 하나의 복의 조건을 소유한 사람이란 의미를 13절~48절까지 말씀하신다. 그 복은 바로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거룩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 관점에서 11절까지를 한 문맥으로 해서, 다시한번 팔복을 생각해 보자.
저 팔복의 조건사안들을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에 의해, 표피적이고, 편협하게, 인간의 자애적 의식의 부산물인, 헬라철학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 되어지고 있고, 가르처져 오고 있는 것처럼, 한 개인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거나, 저 여덟개의 조건에 대한 결과를 얻기 위해,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소유해야 할 조건으로 보는게 타당할까.?
만약, 저들의 저런 해석과 가르침이 타당하고 맞다면, 하나의 개인이 소유한 상황과 삶의 조건이고,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 속한 것이기에, 세상이 그 사람을 미워할 이유도, 핍박할 이유도 없다.
(1) 한 개인이 심리적 공허와 물질적 비소유로 가난하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2) 한 개인이 자신이 소유한 불행으로 아파하고 애통한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3) 한 개인이 부드럽고 따뜻한 성품을 소유했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4) 한 개인이 옳게 살려고 애쓰거나, 부도덕한 일을 당했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5) 한 개인이 타인의 대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소유했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6) 한 개인이 정직하고 깨끗한 마음을 소유했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7) 한 개인이 개인간의 평안을 이루려 애를 쓴다고,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겠는가.?
즉, 저 모든 조건으로 인해, 세상이 그를 미워하고 핍박하려면, 저 조건들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옳고 좋은 영향을 미처주고, 세상 가치의 그것과 충돌을 일으켜서 세상에 그것이 거짓임을 들어내야 미움과 핍박을 받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할 것이기에, 저 조건들을 그것을 소유한 한 개인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려 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저 일곱가지 조건이, 예수의 의를 위해, 미움과 핍박을 받는자인 여덟번째 복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또한, 5장 전체적 문맥으로 보면, 저 팔복은, 곧바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가 가져야 될 태도와 역활인, 빛과 소금으로 이어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과 같은 온전함을 소유하기 위한, 대 전제로써, 그 빛과 소금으로써의 삶의 모습인 계명으로 이어지고 있고, 그 계명은, 하나님과 나만의 일대일의 관계인, 알파벳 'U'짜형태가 아닌, 'L'짜 형태로써 사람들과의 관계로 이어져야 온전하다는 뜻을 말씀하고 있기에, 결코, 저 조건들을 소유한, 그 개인을 위한 것이라 해석 되어져선 안된다는 것이다.
천국은 목적이 아니라, 진짜 목작은 하나님의 사랑의 형상, 곧, 그 분과 같은 온전한 거룩을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필연적 결과이다.
다시말해, 저 일곱개의 조건을 소유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계명의 의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미움을 받고, 죽임까지 당하는 사람들이다.
즉, 나 하나를 위해서 소유하고, 나 하나를 위해서 끝나는 것이, 저 팔복의 뜻이라면, 결코, 예수님의 계명의 의로 인해, 당하게 될 핍박과, 그 계명의 의는, 곧,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슴으로, 저이를 위해 저이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을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 팔복의 조건사안들은, 결코 그것을 소유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 전체에서 말씀하는 핵심은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 부인'으로 소금과 빛으로 살아내야 한다, 이 말씀이다.
또한, 그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그 분과 같은 거룩함을 이루는, 구체적 방법들을 제시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위와 같은 관점과 논법으로, 설명을 보충하며,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말씀하신,
"그 땅에 그 소금"과 "그 세상에 그 빛"에 대한 의미를, 다른 각도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려한다.
첫번째..
우리는 그동안 소금을 말할 때, 소금이 소금으로써의 고유 기능을 내게 되는 과정과 순서는 빼놓고, 그저 단순하게 '부패'를 억제하고 '맛'을 내는 기능 자체에다만 촛점을 두고, 해석하고 말해 왔다. 그러나, 소금이 자기 본연의 기능을 내려면 반드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녹아짐이다. 다시 말해, 부패를 막아야 하는 대상물이나, 맛을 내야 하는 대상물에 골고루 스며들어서 녹아지지 않으면, 부패도 막을 수 없고, 맛 또한 낼 수 없다. 즉, 녹아져서 대상에게 스며들지 않으면, 소금의 재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말은, 4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으로 조금만이라도 헤아려서 생각해 보면, 소금의 기능을 나타내기 위한, 녹아지는 저러한 과정은, "자기 십자가", 또한, "자기 부인"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 이 말이다.
이스라엘, 즉, 히브리의 지형적 환경과 그에 따르는 생활 방식과 사고와 가치관으로 정확히 말하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팔복의 조건과 그 조건으로 예수의 의를 소유한 사람들에 대한 핍박과 고난을 말씀하신 후에, 바로 이어서, '너희는 땅에 소금'이라, 하신 이유와 그 뜻은, 저 팔복의 조건은, 그것을 소유한 너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며, 너희는 그렇게 소금처럼 녹아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전번에도 말했지만, 저 말씀은, 단순히 세상에서 맛을 내라가 아니다. 소금처럼 녹아져 죽어지라는 뜻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저 소금은, 우리가 식용으로 먹고 있는, 물에 타면 녹아버리는 알캥이가 아니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염분이 필요할 때, 혀로 핥아먹는, 한가운데 돌이 박혀있는 덩어리 소금이다. 그 돌이 다 들어나서 염분이 없어질 때까지 세상과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지라는 뜻이다.
소금의 짠 맛이, 소금 그 자체를 위한 것인가. 아니다. 누군가의 입 속에 들어가서 녹아져야 그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되는 것이 소금이다.
두번째..
'너희는 그 세상에 그 빛이라', 하신 말씀도 마찬가지다. 스트롱 코드 사전의 설명으로 보면, 촛불이란 말보다는, 들고 다니는 등불이라 하는게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허나, 빛을 발생시키는 원료가 파라핀이든, 동물의 기름이든, 아니면 다른 원료이든, 빛을 발화시키는 과정은 똑같다. 연소이다. 자기를 태워 연소시켜야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반대로 말해서..
자기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소금처럼 녹아짐 없이는, 돌덩이가 박혀 있는 소금처럼 완전히 맛을 잃어서 사람들이 땅바닥에 내어버릴 때까지, 세상에 다른이들을 위해, 어떠한 편견이나 편애없이 골고루 자기를 내어줄 수 없고... 또한, 자기십자가와 자기부인으로 촛불이나 기름 등처럼 자신을 태우는 연소 없이는, 파라핀과 기름이 완전히 연소되어 소등 될 때까지, 세상과 다른 이들을 위해, 골고루 빛을 비출 수 없다.
즉, 내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죽지 않으면, 맛도 낼 수 없고, 빛도 낼 수 없다, 이 말이다. 무조건 소금과 빛의 삶을 사는것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즉, 녹아짐과 연소 없이는, 그런 삶은 불가능 하다.
여기서, 한가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소금과 빛이 속한 위치에 대한 소유격 명사이다. 개역판들은 모두 소금과 빛의 소유격 명사를, "세상"으로 번역했지만, 헬라어 사본에도, 킹제임스 버전에도, NIV에도, 모두 소금은 "땅"이고, 빛은 "세상"으로 소금과 빛이 소속된 위치를 다른 단어로 기록하고 있다.
헬라어 사본에서 쓰인 단어들은, 소금에는 땅과 흙을 뜻하는, "게(ge)", 라는 여성형 명사이고, 빛에는, 질서있게 정돈된 우주와 모든 만물을 뜻하는, "코스모스(kosmos)", 라는 남성형 명사를 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금이 소속된 위치인 땅을 뜻하는, "게(ge)", 라는 명사에 대한 해석의 문제이다.
그저 단순하게 맛을 내라는 뜻으로 보면, '세상'으로 보는 관점도 맞지만, 내가 위에서 소금에 대해 말했듯이, 저 13절의 뜻 속에,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뜻이 내포되어 있고, 녹아져 죽어지고, 그래서 돌덩이만 남아서 땅에 버려진 소금을 의미한다면, "그 땅의 그 소금"이 맞지. "세상의 소금"은 맞지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형적 환경을 생각해도 그렇다. 현재도 사해와 그 근처에 소금으로 이루어진 소돔산이 있기에,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바다에서 소금을 얻지 않는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무엇이며, 그 행위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6장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율법과 계명을 주신, 근본 목적과 이유는, 사도바울의 로마서의 말처럼,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로마서의 이 구절로 율법과 계명의 목적을 단정지으려 든다. 그런데, 그러다가 계명의 발생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인 산상수훈의 뜻은 놓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계명을 행위로써 나타내야 할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그 행위의 발생자인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행위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내 행위로 영향을 받을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행위 자체로는 결코 죄인이 아니다. 율법을 다 준행했기에 표면적으로는 의로웠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을 보자.. 누구를 위한 행위의 의이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의 의이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신 것이다. 자기자신을 위한 행위는 결코 의로 인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태껏, 산상수훈의 마태복음 6장을 보면서, 겉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저들의 행위에 대한, 예수님의 반대적 뜻을, 그져 "조용히 보이지 않게 하라"로 해석해 오고 가르쳐 왔었다.
소위 말해, 내가 쌓는 미덕을 위해서라는 쪽으로 말이다.
허나 저렇게 말하면, 저것이 곧. 자아애(自愛)의 부산물인, 불교와 같은 맥을 잇는 헬라철학이다.
저런 해석은, 겉으로 나타내는 저런 행위들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이 미치게 되고, 또한, 대상에게 어떠한 심리적 상태와 결과를 낳게하는 행위들인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해석과 가르침이다.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겉으로 들어내는 저 행위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뿐 아니라, 하나님께, "내가 당신의 법을 이렇게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었다는 사실이다. 자아, 그렇다면, 저들의 저 행위들은 결국 누구를 위한 행위인가. 자기 자신이다. 6장에서 예수님의 반대적 뜻은, "조용히 보이지 않게 하라"가 아니다. "너 자신을 위해 하지말고, 상대를 위해 하라"는 뜻이다.
5장으로 다시 돌아가서..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소금과 빛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을 뜻 한다고 설명 했다.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먼저 화해를 청할 수 있는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오른뺨을 맞고 왼뺨도 돌려댈 수 있는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상대를 의식하는 죄의 생각조차 조심할 수 있는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속옷을 빼앗겼는데 겉옷까지 내어줄 수 있는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내가 손해를 보면서 상대가 원하는 그 이상을 해줄 수 있는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없이, 나를 죽이려는 원수를 위해, 기도해주고, 사랑할 수 있는가.?
즉, 다른 이들을 위한, 이러한 의도적 행위들이,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녹아지고, 연소되는 소금과 빛의 삶이고, 하나님과 똑같은 거룩을 이루는 거룩한 사랑의 의이다.
다시 말해,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죽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열거하신 다른 이들을 위한, 저 모든 행위들은 결코 나타날 수 없는 행위들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산상수훈의 서두와 동시에 고난과 핍박의 복인, 저 팔복은 바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위에 열거하신 저 모든 것들을 나타내기 위한 준비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죽지 않고도, 나타낼 수 있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6장에서 언급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자기 자신을 위한, 거짓된 저런 행위의 의이들인 것이다.
자아, 그러면, 지금부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에 내포된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뜻과 의미를, 시편 1편을 통해서 찾아 보고, 또한 이것을 통해, 예수님의 신실하고 의로운 복을 생각해보려 한다.
우선 우리가, 시편 1편 전체적 문맥으로 몇가지 알아야 할 부분이 있다.
첫번째.. ..
히브리 원문에서 시편 1편의 상황적 배경은, 어느 한 개인을 쓰러트리기 위한, 모략을 꾸미기 위해 모인 모의의 장소로 봐야 한다.
왜냐면, 1절에, 복의 사람이, 동참하지 않는, 그릇된 사람들의 자기 소원인, 저 세가지의 일들, 곧, "악인의 꾀(counsel)"와, "죄인의 길(way)"과, "오만한 자의 자리(seat)" 라는 말에 들어 있는 소유격 조사는 히브리 원문에서는 단수가 아닌 복수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개역개정판에는 복수로 수정되어 있지만, 개역한글판에는 단수로 표현하고 있었기에,이 부분을 명확히 짚어놓고 정리를 해놔야, 바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두번째.. ..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은, 시편 1편에 핵심적 주어는 1절에 "복 있는 자"가 행하지 않는 저 일들이거나 , 그 일들을 행하지 않아서 얻어진다고 말하는, 3절에 결과가 아니다.
그 핵심적 주어는 바로 2절에, "여호와의 율법안에 자기의 기쁨을 두고, 매순간 그 율법을 염두하면서 삶을 사는 복"이 핵심 주어이다. 왜냐면, 저 사람이 행하려 하지않는 일들의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의 그 말씀과, 그 계명과, 그 가르침이기 때문이고, 그것이 곧 그 말씀을 따라가는 길이며, 그 말씀을 따라가는것 자체가 복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그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따라간다는 것은, 나를 죽이는 삶이고, 그로 말미암아, 그 사람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만 보고 설명을 하더라도, 시편 1편은 산상수훈과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서 쓰인 표현을 보면, 산상수훈과 꼭 닮은 또 하나의 공통점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1절부터 극도로 복받쳐 오른 감정적 감탄사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즉, "복되도다! 이 사람은",이라는 표현이다.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지만, 이 부분은, 마태복음 5장 3절~11절의 팔복들의 서두와 똑같다.
아니, 서두만 같은게 아니다. 우리에게 가라고 지시하는 방향과, 기준과, 방법과, 과정이 똑같고,
이 모든것으로 살아내야 할 다른 이들과의 관계적 동기와 목적마져도 똑같다. 또한 그로 인해,
내게 부정적으로 다가오는 중간 결과도 똑같고,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결과도 똑같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는 사도바울의 이신칭의적 신학을 너무 '나'를 중심으로 해서 해석하고 강조한 나머지, 예수님의 말씀인 사복음서는 외면하고 있고, 그저 단순하게 윤리 도덕적인 참고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에 전하라 하신것은 예수님과 그 분의 말씀이지, 사도바울의 신학이 아니다. 또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구약성경에 대해, 히브리적 가치와, 사고와, 관점을 통해, 다시 설명하신 말씀들임을 우리가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부분의 관해서는 나중에 글을 따로 쓰려한다..
세번째.. ..
우리는 대부분, 시편 1편1절을 읽으면서, 여기에서 복의 사람이 하지 않는, 저 세가지 행동은, 옆에서 아무도 부추기는 사람도 없는데, 소문으로 들려온 남모를 누군가의 그릇된 행위들을 따라하지 않으려고, 그저 아무런 고민도 없이 혼자 결정한 행동이라는, 정쩍인 관점으로 느끼고 보고 있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저 1절에 나타난, 히브리어, 원문에서 쓰인 단어와 문맥은, 내 생각과 판단과 결정에 대해, 옆에서 다수의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인 개입과 입김이 들어오고 있고, 충고받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자기 의지로 하지 않는 행동이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단어중에 하나로써, 개역판들에는, "꾀"이고, 킹제임스에는, "간계"로 기록하고 있는, 히브리어, 엣짜(etsah)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단어로 보인다.
왜냐면, 저 단어의 사전적 뜻은, 계획적 충고와, 신중한 모사, 곧, 책사(冊使)적 카운셀러를 뜻하기 때문이다.
즉, 가장 믿을만 하고, 가까운 측근들에 의해, 받고 있는 충고와 조언과 코칭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우선, 1절에 나타나 있는 세부류의 그릇(잘못)됨에 요소들을, 히브리어 스트롱코드 사전을 통해, 각 단어의 원레의 뜻부터 알아보려 한다.
첫째..,
"꾀", 또는, "간계"라는 말은, 히브리어, "엣짜(etsah)"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와 문법은, "충고, 계획, 신중함, 모사"를 뜻하는 여성형 명사이다.
"엣짜"의 어근은, "충고하다, 공포하다, 숙고하다, 결심하다, 충고를 받다"를 뜻하는 "야아쯔(yaw-ats)" 라는 동사이다.
둘째..,
"길"이라고 번역 해놓은 히브리어 단어는, "데레크(deh-rek)"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와 문법은, "길을 밟는, 여정, 양식, 따라서, 떨어져, 때문에, 대화, 습관, 여행, 태도, 통행자, 통하여, 향하여, 길, 어디로(든지)" 라는 다양한 뜻이 내포된 남성형 명사이다.
"데레크"의 어근은, "밟다, 걷다, 시위를 달다, 활쏘는 사람, 구부리다, 오다, 당기다, 건너다, 안내하다, 앞서서 이끌다, 타작하다"를 뜻하는 "다라크(daw-rak)"라는 동사이다.
셋째..,
"자리"라는 말의 히브리어 단어는, "모-솨브 (mo-wshab or mo-shab)"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의미와 문법은, "터, 회기, 자리, 주거, 인구, 상황"이라는 뜻의 남성형 명사이다.
"모-솨브"의 어근은, " 거하다, 계속하다, 결혼하다, 남아있다, 안정하다, 안주하다(필자 주)"를 뜻하는
"야솨브(yaw-shab)" 라는 동사이다.
그러면, 저 세가지 단어의 원레의 뜻을 살려서, 다시 표현하면 어떤 표현이 될까.?
나는 이것을 2절의 "하나님의 율법"과 연관시켜서 아래와 같이 말해보려 한다.
첫째, "악인들의 꾀"라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자들의 충고와 조언과 코칭을 통한, 자기 자신을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꾸미는 술수와 획책",이라는 의미의 표현으로 풀이 할 수 있고..
둘째, "죄인들의 길"이라는 말은...
"타락한 인간의 속성에서 나온, 자신이 자신을 위해 정해놓은 형식과 습관적 방법과 수단을 통한, 자기 합리화로 정당화된 타인에 대한 태도",라는 의미의 표현으로 풀이 할 수 있고..
셋째, "오만한자들의 자리"라는 말은...
"그렇게 자기 합리화로 정당화된 태도로, 자기 이익을 위해, 타인의 약점에 대한, 자신의 상황적 행동을 정당화하는 기회주의자의 자기 안주",라는 의미의 표현으로 풀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저 세가지의 자기 자신을 위한 일들을 거부하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율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늘 가슴에 새기고 묵상하는 사람이고, 그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의 율법, 곧 그 계명의 참 뜻은, "네 이웃은 네 몸에 붙은 일부이기에 사랑하라"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계명의 참 뜻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나는, "히브리 원문에서 시편 1편의 상황적 배경은, 어느 한 개인을 쓰러트리기 위한, 모략을 꾸미기 위해 모인, 모의의 장소로 봐야 한다",라고 언급 했다.
그렇다. 바로 저 세가지의 악과, 저것들에 대한 거부를 선택한 복의 사람의 저런 의지적 행동은, 결코 하나님과만의 일대일로 끝나는 선택의 행동이 아니며, 어떠한 모양으로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결과의 일부분이며, 또한 시발점이란 것이다.
위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이것이 문맥과 각 단어의 내포된 뜻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시편 1편에 보이지 않는 상황적 배경이다.
자아, 그렇다면.,
저 세가지의 악에 대해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저 복의 사람의 행동으로 인해서, 그와 사람들과의 관계는 대체 어떠한 결과적 모습으로 나타날까.. 나는 이 부분을,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통해 그대로 설명해 주셨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시편1편 자체만으로도 얼마든 그려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시편1편과 같은 서두로 시작되는 마태복음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시편1편에 숨겨진 또다른 상황을 그려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마태복음 5장 10절~12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다.
이 구절을 통해 우리는, 복의 사람이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그 일로 저 사람에게 다가오는 부정적 중간 결과를 헤아려 볼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위에 세가지의 단어의 들어 있는 뜻을 살려서, 저 사람에게 다가오는 부정적 중간 결과와 그 상황을 연출해 보자.
(*********** 상황 연출 시작 ***********)
어느 으슥한 장소에 회의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다. 희의의 장소는 자기들을 반대하는 반대파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모의하기 위해, 소집된 모의의 장소이다..
자리의 모인 사람들이 한사람씩 일어나 자신이 생각한 방법을 말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말을 다 듣고 있던, 고문껵으로 보이는 가장 연로한 노인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 각자의 생각은 잘 들었소. 그런데, 우리가 우리 손으로 그 사람을 제거하면,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지탄하고 탄액하려 들 것이요. 그러니 우리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그 사람이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생각한 방법을 먼저 말해 보겠소... 저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칭송을 줄기차게 듣는 사람이잖소? 그러면 그것을 우리는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요. 그 사람과 가까운 누군가를 시켜서 특정 장소로 불러냅시다. 그리고 그 장소의 거지로 행세하는 창녀를 동원해서 그 사람에게 접근하게 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물건중에 그 사람의 것임을 누구라도 알아 볼 수 있는 물건을 달라고 시킵시다. 그 사람 성품에 주지않을 수 없을테니, 우리는 바로 그 물건과 창녀를 통해 , 그 사람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리는 것이요. 그러면 아무리 무관하다 변명을 해도 결국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고, 견디다 못해 자기 스스로 그 자리를 떠날 것이 아니요? 어떻소.? 내 생각이.."
라며, 간계스런 획책을 내놓았다.
그 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한사람이 무릎을 탁 치며 일어서서 탄복하며 말하였다.
"아하~, 역시 연륜이 있으신 책략이십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그 방법이 가장 안정적으로 우리를 지키며 그 사람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그리 생각 하시지요.?"
라며, 사람들의 동조를 끌어내는 손짓과 눈짓을 내 보였다.
또 한사람이 간사스럽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허어!~, 좋은 생각이십니다. 저야 뭐, 제게 손해만 없으면 어떤 방법이나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제가 나서지 않고, 제 자리를 지키며, 처리 할 수 있다면냐 대찬성이지요. 안그렇습니까 여러분.?",
이라며, 이 사람 역시 사람들의 동조를 구하는 말을 했다.
이 사람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박수가 멈춰지고, 일어섰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리에 앉지자, 획책을 제의 한, 노인 옆에서 혼자만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격노한 표정으로 그 노인과 박수 치던 사람들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이 자리에 동석하신 여러분들보다 연소하지만, 감히 제 양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말씀을 드릴터이니 제 말을 들어보십시요.. 여러분은 언제까지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무시하며, 살아 가려 하십니까. 계명에 뭐라 하셨습니까. '네 이웃에 대해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는지요..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무슨짓을 하려는 겁니까. 비록 지금 당장 우리에게 손해가 되고, 우리가 피해를 본다 하더라도, 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앞날을 본다면, 반대를 말씀하시는 그 분의 말씀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 모인 우리들의 기득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옳고 그름은 분별하지도 않고, 그 분에게 억울한 누명을 쒸우는 죄를 도모하겠다고요.? 저는 결단코 반대입니다. 그 의견을 내어주신, 제 옆에 계신 저희 아범님과 등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저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라며, 단호하고 굳은 표정으로 말하였다.
그 사람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노인과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지며,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려는 듯 모두 입을 다물어서 주위는 갑자기 적막으로 휩싸이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노인이 껄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적막을 깨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는 내 아들이지만, 참으로 인생을 모르는 어리석은 말을 하고 있구나. 우리가 그 사람을 죽이자고 했느냐.?, 죽이자는게 아니고, 그 사람에게서 말을 할 수 있는 권한만 빼았자는게 아니냐. 내 의견이 조금은 비열해 보일지 모르지만, 성경에도 한사람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이 살것이다 하였다. 만약 내 의견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면, 그분의 또 다른 법인 속죄제를 드리면, 용서해주실 것이니, 너는 쓸 때없는 말로 요란떨지 말거라."
라고, 자기 아들을 다그쳤다..
노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언행에 대한 정당화와 합리화로 덮어주는 노인의 말에, 다소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에게 한마디씩 충고와 조언을 하였고, 어떤이는 협박조의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물러서지 않고, 자기 아버지에게 조용하고 단호한 음성으로 말하였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계명을, 한낫, 사람의 입맛대로 악용하시려 하십니까.? 만약에 이 일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저는 이 일의 진실을, 우리를 반대하는 그 분에게 말씀드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저는 아버지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이런 자리에 저를 불러드리지 말아주십시요."
라며, 사람들 사이를 해집으며,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 상황 연출 종료 ***********)
자아, 바로 이런 숨겨진 상황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시편 1편이다.
그런데, 여기 이 상황 다음에 전개 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또다른 숨겨진 상황이 본문 안에 있다.
그러면, 여기서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좀더 깊이 생각해 보자.
만약, 위에 시편 1편 1절에 들어 있는, 복의 사람이 따르지 않는, 저 세가지 일에 들어 있는 단어의 원문적 뜻을 살려서 구성해본, 저 상황이 그대로 진행된다면, 과연 저 일에 반기를 들고 뛰쳐 나아간 저 사람에게는 어떤 결과적 상황이 들이닥칠까.?
지구상, 어느 사회속에서나 이렇게 혼자만 튀는 사람은, 속된 말로 왕따를 당하고, 더욱이 도덕성으로 어느 집단과 개인을 질타하는 사람일경우, 질타를 듣는 대상들에게 따돌려지고, 각종 음해와 모함의 대상으로 몰리게 될 가능성을 소유한 사람이다.
즉, 이 사람이 겪게 될 결과적 상황은 바로 고난과 핍박은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죽음까지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이다.
자아, 그렇다면, 저 시편 1편을 여태껏 우리가 이해하고 인식해오던 것처럼, 단순히 세상에서 평안과 안위를 누리기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착하고 선하게 살라고 말하는 도덕윤리적 참고서로 볼 수 있겠는가.. 또한, 시편 1편과 같은 서두와 문체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에 서두인 팔복을, 저 말씀을 듣는, 한 개인의, 현 상황이거나, 처지를 소유한 사람이라 보고, 자기 자신이 누리기 위한, 조건이라고 봐야 옳을까.. 아니, 결단코 아니다..
우리 한번 생각해보자.. 저 시편 1편에 복의 사람이 선택하지 않은 저 일들로 인해, 저 사람에게 다가올 부정적 결과들, 곧 고난과 미움과, 음해와 모함과, 핍박과 죽음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데, 과연 3절에 뜻을 단순하게 세상에서 나를 위해 내가 누릴 복이라 말하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저 3절은, 저 모든 하나님의 의이를 선택해서 당연하고 마땅하게 주어진 부정적 결과를 거처온 결과라는 것이다.. 즉, 저 3절의 뜻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구절이다.
자아, 이제.. 시편 1편에서,
산상수훈에 팔복의 뜻이 보이지 않는가.. 또한,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이 보이지 않는가..,
복의 사람의 저 모습이, 곧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모습이다.. 또한 저것이 하나님의 계명과 그 뜻을 따라가는, 저 복의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주어진 과정을 거쳐오고 있는 부정적 중간 결과이다.
또한, 이러한 부정적 중간 결과를 거쳐서 저 사람에게 최종적으로 주어진 결과가 3절이다 이 말이다.
그러나, 저 3절에 결과를 소유한것 자체를 복의 사람이라 불러선 안된다. 하나님의 진리의 계명의 말씀이, 그 사람안에 있어서, 그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타내는 그 사람 자체가 이미 복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명코 가슴에 새겨둬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그 뜻을 따라가는 삶은, 결코 하나님과 나만의 1대 1에 관계로 끝나는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계명과 그 뜻은, 오로지 예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가 상대만을 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산상수훈을 통해, 예수님은, 시편 1편의 뜻을 긍정적 반어법으로 그대로 다시 설명을 해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 유대인적 믿음은 그 믿음의 소유자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시편 1편에서 나타났듯이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는 것이 믿음이라면, 그 하나님의 법은 다른이를 위한 타주도적 사랑을 통한 공의이고, 그것을 이루며 따라가는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내가 천국갈 것, 그것을 믿는가.? 세상에서 부하게 되고, 형통할 것을 믿는가.? 이 모든것은 예수님의 믿음으로 믿고, 그 믿음으로 저러한 삶을 살아간 것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이 결과는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다 이 말이다.
우리의 목적은, 예수의 사랑과, 예수의 믿음으로 하나님과 같아져 드리는 것이며, 다른 이들도 하나님과 같아져 드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오직, 무자애(無自愛)의 상대만을 위한, 예수의 그 사랑과, 예수의 그 믿음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