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슴이라 불리운 예수님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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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이라 불리운 예수님의 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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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28 02:09:39

** 사슴이라 불리운 예수님의 제자 **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 36절~43절에 언급되어진, '다비다'라는 예수님의 여제자는, 그 이름의 뜻이 사슴입니다..

참 고운 이름이지요. 그런데 어쩌면, 저 이름은, 본명이기 보다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소유했던, 그 사람의 별명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왜냐면, 다비다는 시편 42편 1절에 싯구처럼, 시냇물을 갈망하는 사슴이 되어, 주를 찾고 따라가는 삶을 소유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죽음 이후, 그제서야 비로서, 다른 여자들의 눈물어린 증언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여인을 향해, 예수님의 제자라고 이구동성 단언해서 말들을 하고, 증거하는 그 근거는 과연 무엇일까요.

신약성경 전체에서, 여자를 예수님의 제자라고 호칭한 예를 찾기가 어려운데 말입니다.
그 근거를 찾으려면, 우선 제자도의 시작과 끝인 산상수훈을 다시 읽어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속옷을 달라하는 이에게 겉옷까지 주라.” 고요..

그런데, 다비다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삶을 증거하는 다른 여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다비다가 만들어준 속옷과 겉옷을 베드로에게 보여주며 다비다를 증언합니다.

뭔가 맥이 통한다는 생각이 안 드시나요.
지난번에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의 저 말씀은, 상대의 부끄러운 모습을 가려주라는 뜻이라고 말씀 드렸지요.

그런데, 저의 이런 해석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자아, 한번 생각해 보시죠. 속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자기 몸 전체를 가릴 수 있는 겉옷이 있었다면, 과연 속옷을 달라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겉옷으로 다 가려질 수 있는데 말입니다.

즉, 예수님의 저 말씀은, 상대가 요구해 오는 것에, 몇배로 더해 주라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으로 생각하고, 그 상대가, 죄를 짓거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가려주거라.. 바로 이 뜻이란 겁니다.

앞으로 저는 산상수훈을 놓고, 다른 글을 통해 계속 말하겠지만, 산상수훈 전체를 바로 이러한 관점과 시각으로, 다시 목상하며 재해석해 나가려고 합니다.

다비다가 살았던 욥바라는 도시는,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어져 오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들 중에 한 곳입니다.

항구도시.. 예나 지금이나, 이 항구도시들의 특징들 중에 그 하나가, 수 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고, 각종 물물들이 오고가는 도시이기에 경제적으로는 쪼달리지 않겠지만, 각종 우상숭배는 물론이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굉장히 난잡하고, 윤락업이 기승을 부리는 곳이 항구도시입니다.

그러면, 다비다가 도왔던 여자들은 대체 무슨 일을 했던 여자들이었을까요. 물론 가난으로 힘겹지만, 평범한 여자들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욥바가 항구도시라는 점을 감안해서 생각해 본다면, 다비다가 도왔던 여자들은 윤락업에서 일을 했던 여자들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옷의 용도는, 첫 번째가 사람의 수치를 가려주는 것이, 그 일차적 용도입니다. 만약 제 판단이 맞다면, 다비다는 예수님의 저 말씀의 뜻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며, 그 여자들을 악에서 건져냈고 수치를 가려 주었던 사람이었기에, 예수님의 제자라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모세오경에 보면, 욥바는 단 지파에 속한 땅이었고, 또한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배를 탓던 곳이 욥바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있어, 욥바라는 항구도시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해, 그 뜻을 전하는 출발지로 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가라 하셨던 니느웨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땅입니다.

그리고, 다비다를 도우려고 욥바로 갔었던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이방인의 음식을 먹으라” 하시면서, 로마 백부장인 고렐료의 집에 가라 하십니다.

바로 이 때부터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해지는 시발점이 됩니다. 욥바를 기점으로 사용하셔서 말이지요.

여기서 저는 우리가 현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가지 지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이방인들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복음은 누구를 통해 전해졌습니까. 단언컨대 유대인들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도마, 바울... 등등..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뭐라 말하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지 않고, 예수님을 죽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버리셨고, 그 유대인들을 대신해 우리가 이스라엘이 됐다.”.. 라고 말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니요.. 하나님은 결코 유대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우리 이방인들을 이스라엘로 대신 하지도 않으셨고요.
다만 우리는 사도바울의 말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이스라엘에 접붙임 받은 존재들이란 사실입니다.


자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사슴이라 불리웠던, 예수님의 여제자, 다비다. . .
저는,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줄곳, 시편 42편 1절에서.. 42편의 기자인, 고라의 자손이 말하고 있는, 한마리 사슴의 목말라하는 그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써 내려왔습니다. . .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하는 것 같이. 오 하나님이여.. 내 영혼도 그처럼 주를 갈망하나이다. . ."

42편 기자는, 자신의 갈망으로 인해, 한마리 사슴의 갈증의 고통을 보게 되고, 그 사슴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시키며, 위에 저 고백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독자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단 한번도 목마름의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목마른 그 고통을 알 수 있습니까.?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가난의 힘겨움을 맛보지못한 이가, 다른이의 가난에 힘겨움을 알 수 있습니까.?
살면서 수치와 멸시를 당해보지 못한 사람이, 다른이들의 수치를 가려주고, 보듬어 줄 수 있습니까.?
건강하게 태어나 육체에 불편과 제약을 느껴보지 못한 이가, 장애를 가진 이의 삶을 알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시작점부터, 만물들에 정해 놓으신 물리적 섭리의 조건으로 인해, 시간과, 공간과, 육체와, 인지력에 제한을 갖고 태어납니다. 즉, 자기 자신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결코, 저 모든 고통과 힘겨움..수치와 불편함을 알수 없고, 인지할 수도 없는 그 존재가 바로 사람이란 것입니다. . .

42편의 기자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갈망 때문에, 평소에는 처다보지도 않았고, 관심조차 없었던, 한마리 사슴의 목마름을 인지하고,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비다 또한, 자기 자신이 한마리 사슴의 목마름에 고통과 힘겨움을 소유한 여자였기에, 다른 이들의 아픔을 보듬고, 그들에 수치를 가려주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저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다비다는, 자신이 소유한 목마름에 고통과 힘겨움을, 다른 이들을 위해, 준비된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한, 내게 채우게 하시는, 예수님의 남은 고난의 일부분으로, 여겼을 것이라 이 말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제자됨의 기준과 조건이,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지는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지는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죽음 없이는, 산상수훈에 기록된, 다른 이들을 위한, 예수님의 저 모든 말씀들은 결코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발짝 더 들어가서, 아무리 자기 자신이, 한마리 사슴의 목마름에 고통과 힘겨움을 소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인간 타락의 본성인 자기애로 눈이 가려져 있기에, 자신의 제한된 경험에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해 버리고, 제단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고, 자기 경험으로는 다른 사람의 모든것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사정을 헤아려주고, 이해해 준다는 것은, 결코, 내 경험들을 통해 되어지는게 아니라, 나의 그 모든 경험들이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지는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의 죽음이 되어져, 사람의 깊은 곳을 아시고, 헤아리시는 예수님이 내안에 들어와 사실때만이. 예수님 그분이 바라보시고, 헤아리시는 그 마음과, 그 의식과, 그 눈으로만 이룰 수 있고, 가능하다는 이 말입니다.

자아,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시간과 공간, 육체와 인지력에 모든 제한과 제약이,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또한, 지금 내게 다가와 있는 모든 힘겨움과 고통이, 나를 쓰러트리기 위한,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가난의 어려움과 힘겨움, 수치와 멸시에서 나를 가려서 보듬지않는 상황이,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면서, 사람으로 누려야 될 모든 희노애락을 느껴보지도 못하는 저와 같은 삶이, 과연 저주입니까. 축복입니까...

저는.. 단언합니다...
저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상대를 위한 온전한 사랑을 하기 위해, 조금씩 준비된 사랑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요...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그 온전한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것을 제한해 놓고 계시고, 여러분의 모든것에 함께 동참하시고, 모든것을 함께 느끼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이요, 권면을 끝으로 적겠습니다...

[한글 KJV 성경.. 고린도후서 1장 3절~7절...]
<3> 하나님을 송축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시라.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고난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라.
<5>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기 때문이라.
<6> 우리가 고난을 당하여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니, 그것들은 또한 우리가 겪는 동일한 고통을 잘 견딜 수 있게 해 주며,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한 것이라.
<7> 너희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확고함은 너희가 고통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가 또한 위로에도 그러한 줄 우리가 앎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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