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내가 그 처음이요 그 마지막이다.. *** 이사야 44장 6절~20절.. 오늘 본문은 지난번과 이어질 수밖에 없는 본문입니다.. 지난번에는 왕하 19장과 이사야 1장으로 당시의 대략적 상황을 봤다면, 오늘은 좀 더 구체적 상황을 이사야가 증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옷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기까지 4대 왕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의 집필을 그때그때 적어놨던 글들을 하나로 묶어서 재 집필을 한 것인지? 아니면 자서전이나 전기를 쓰듯 기억을 더듬어 단기간에 집필을 했는지? 얼마큼에 시간을 들여서 완성했는지 구체적 시간은 모르겠지만, 이사야서가 완성된 시기는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은 지 14년 이후에 완성했다는 사실은 36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집필 방법이 전자이든 후자이든 상관없이 1장을 서두로 봤을 때, 1장을 웃시아 왕 때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1장1절에서 4대의 왕들을 동시에 언급하며 이사야가 본 환상이라고 한 부분을 보면, 집필 시작 시기도 히스기야 때라고 봐야 옭기에 1장도 히스기야 때에 상황을 서두로 적은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1장을 웃시야 왕 때라고 하더라도, 36장의 히스기야 14년 까지도 상황이 변하지 않고 있었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우상을 만드는 그 것, 44장은 바로 그 연장선으로 봐야 한다는 거지요. 어떤 사람은 40장부터 문체가 달라지기에 오랜 후대에 다른 사람이 덧붙인 거 아니냐 하며, 40장부터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후에 기록하고 예언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신약에서 분명히 이사야서를 이사야가 쓴 글로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사야 44장을 언 듯 보면, 위로와 구원과 회복의 약속으로 보는데요. ‘위로 장으로 보느냐.?’, 반어법적인 ‘책망 장으로 보느냐.?‘ 이 문제는 두가지 측면을 다 생각해 봐야 하지만, 39장의 스스로 교만해져서 바벨론 왕에게 자기 자랑을 늘어놨던 히스기야의 모습을 하나님이 보시고 그것을 표삼아 하시는 말씀으로 본다면, 과연 위로이겠느냐 이겁니다. 다시 말해, 니가 니것인 듯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 그것들은 나로부터 시작된 것이며, 내가 끝낼 것들이다. 너라는 존재 자체가 나로부터 시작 되어졌는데, 너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듯, 내가 만들어 놓은 저 나무들을 가지고 너의 먹을거리를 익히는 불 쑤시게로 쓰면서 그런 불 쑤시게를 가지고 말 한마디 못하는 거짓으로 너를 위한 하나님을 만들어 우상으로 섬기고 있구나. 야곱아 들어라, 너는 니가 만든 저 우상의 종이 아닌 나의 종이다. 나는 너를 나와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지어냈다. 나 홀로 너를 만들었다. 그런데 너는 지금 누구를 하나님이라 하느냐.? 너의 죄를 용서할 자도 나이고, 너를 벌 줄자도 나이다. 나는 미래를 점치는 점쟁이들의 말을 미친 소리로 만들고, 지혜를 말하는 자들의 지식을 모두 허풍으로 만들 수 있는 그가 나이며, 오히려 그들이 얕보는 작은 자들을 통해 그들을 부끄럽게 할 자도 나이다. 야곱아 내게 돌아오라 내가 너를 용서하겠으니 돌아와 나와 같은 모습을 이루라... 44장을 끝까지 읽어보면, 이와 같은 반어법적인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인인 듯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요. 그러나..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죄이며 그것이 심판의 이유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서 그 분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열매를 맺는 가지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만이 예수님의 제자와 친구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모두 다 이렇게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