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아들이, 다윗의 아들에게.. 마가복음 10장 46절 이하 말씀에서 종전에 해석과는 다른 각도의 해석으로 생각해보려합니다. ‘바디메오’ 라는 이름의 어원과 그 뜻을, 어떤 이들은 헬라어 스트롱코드 사전으로만 찾아보고 해석한 나머지 ‘존경, 또는 헌신하는 사람’이란 식으로 해석해서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사전이 이 이름을 설명하면서 히브리어 어근이라 해놓고, 히브리어 스트롱코드 사전의 코드번호를 적어놨기 때문입니다. ‘바디메오’의 어원은 히브리어 ‘바르=아들’와 ‘타메=부정함’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 뜻을 해석하면, “부정하고 더러운 자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름도 없이 사람들이 지어 부르던 별명이었다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나환자나, 걷지못하거나 보지못하는 사람들은 부정하다해서 성전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것과 같은 맥으로 말이지요. 제게 하신 질문처럼, 예수님은 저 사람이 볼 수 있게 해주길 원한다는 걸 이미 아셨을 텐데, 왜 물어보셨을까요.? 이 사건은,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그런데요. 예수께서 저 질문을 하시기 전에는, 바디메오 스스로가 눈을 뜨길 소원해서 “긍휼을 배푸소서.”라고 소리쳤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해석은 표면적으로 압축되어진 얘기만을 보고 말하는 결론일 뿐, 저 사람이 처한 실체적 상황과 여건과 입장은 다 배제해 놓은 해석입니다. 우리는 줄곧 이 사건을 접하면서,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은 이유를, 자신의 겉옷을 내어 던지고, 다른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적극적 자세로 예수님께 달려간 것 자체를, 예수님이 믿음으로 보셔서 고쳐주신것이다로 해석하고 의미를 두고 말하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가 놓쳐버리고 있는게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이름도 없이 ‘죄인의 아들’로 불리운 사실로 보면, 후천적 장애인이 아니라, 선천적 장애인이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그렇다면, 2천년전 그릇된 해석으로 관행화 되어버린 율법으로 인해, 따돌려지고 무시당하고 부모에게서도 버려져서 거지가 된 존재가 저 사람인데, 과연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은 아니다지요. 자아, 그러면.. 선천적 시각장애인이기에 글자를 배울 기회도 없었을 것이고, 남들이 갖고 있는 직업의 기술들도 눈으로라도 익히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구걸밖에 없었다는 얘기이거든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지금 당장 시각장애에서 벗어나게 되고, 볼 수 있게 된다면 구걸 자체를 그만둬야 되고, 따라서 생계가 위협받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 분명히 저 사람에겐 사람들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인해, 그 마음에 크나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죄인의 아들’이란 말은, ‘너의 부모가 죄를 지어서 니가 그렇게 태어난 거다.’라는 의미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저를 비롯해 반듯한 사고의식을 가진 장애인이라면 누구나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저 소리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본인은 그 소리에 대해 어떤 해석을 할 수 밖에 없을까요.? “내가 세상에 태어나므로 내가 내 부모를 죄인 만들었다..”는 자괴감의 해석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저 사람에겐 안보여서 불편한 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바로 이 관점으로 예수님의 저 질문을 헤아려서 해석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글 개역성경들은 ‘다윗의 자손’이라 번역해 놨지만, 헬라어 원문에서는 ‘다윗의 아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이면 누구나 다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권을 가진 이는 오직 예수님이시기에 적통을 표현하려면, ‘다윗의 아들’이라 번역하는 게 맞을 것 같네요. 원문 성경 그대로, ‘죄인의 아들’이, ‘다윗의 아들’에게 소리쳐 간구합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이 외침은 정확한 목적이 있는 외침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내 눈 좀 보이게 해주세요.’라는 의미의 외침이 아닌, 그저 단순히 절박함으로 이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뿐이고, 더 정확히 말하면, 소문으로 들어서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시는 능력이 있는 분임을 알고 있지만, 자신이 소유한 삶의 조건과 상황을 벗어나면, 당장 자신에게 다가올 자신의 비 확실한 미래로 인해, 긍휼만을 구할 수밖에 없어서 외쳐진 갈등의 외침이고, 예수님께 구해서 눈을 뜨면, “죄인의 아들”이란 닉네임은 떼어내고 거기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자신이 생존의 도구로 사용했던 시각장애라는 조건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인 구걸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그 사실로 갈등할 수밖에 없어서 외쳐진 그것이 바로 저 갈등의 외침이란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외침을 통해 저 사람의 마음을 보셨던 겁니다. 그래서 이런 뜻으로 저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 지금 당장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길 원하느냐? 아니면, 너는 배운 것도 없고, 당장 니가 할 수 있는 일도 없기에 배고플 테지만, 너의 미래를 도우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보는 자유를 얻어서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원하느냐? 너는 선택하라.“ 자아,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너의 길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라고 말씀하신 저 믿음이.. 과연, 방해를 받으면서도 소리치고, 걸리적거리는 옷을 벗어 던지고, 예수님께 달려간 것을 믿음이라 하신 걸까요.? 아니요. 저 믿음은, 선택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 당장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도우실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한 그 믿음입니다. 그 뿐 아니라, 지금 당장 굶어 죽어도, 장애라는 죄인의 꼬리표를 떼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한 믿음이란 겁니다. 저의 이 해석이 가능한 정황적 증거가 52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고쳐주시면서 “너의 길을 가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위에 제 해석으로 저 사람의 행동을 생각해 보세요. 이것을 흔히 영적으로만 해석하지 말고, 저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지나친 영적 해석은, 예수님의 사람들을 향하신 그 마음과, 그 대상자의 입장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4복음서에서 나타나 있듯이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후에, 자신을 따라다니게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가서 전하라.”라고 하셨다는 것이고, 또한 고침 받은 사람들 중에도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왜 따라가야 했을까요? 이유는 두 가지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돌아갈 집이 있었다면 이 사람도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돌아갈 집이 없었다면 어찌해야 했을까요.? 여기다가 위에 해석과 같이 구걸도 못하게 됐기에 당장 생계가 힘들다면, 어찌해야 했을까요.? 직업을 갖기 전에는 예수님 일행을 따라다녀야 하지 않았을까요.? 또 하나, 이 사건을 통해서, ‘죄인의 아들’로 불리운 저 사람의 입장뿐 아니라, 사람들의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의 처한 상황과 조건과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내가 중심이 된 관점이 아니라. 그가 되어 헤아리시고, 상대만을 위해 의식하시는 무자애(無自愛)의 예수님의 마음을 봐야한다는 겁니다. 그런데요, 오늘날 이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예수 믿는 많은 장애인부모들이 이 부분을 잘못 선택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에 치우치고, 너는 아무것도 못할 거라 여겨서 아이를 그냥 집에다 방치해두는 이들도 있고,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그저 형제자매들에게 떠넘기면서, 그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해놓지도 않고, 그 아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다른 자식들과 공평하게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준비도 시켜주지도 않으면서, ‘나 없으면 어쩌냐?’하며, 아이에게 좌절감만 심어주고, 아이의 입장과 마음은 조금도 헤아리지 않고, 남들이 자기 고생하는 것만 알아주길 바라는 이들도 있고, 과연 이것이 믿음일까요? 그런 부모들의 선택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의 선택이 아니라는 거지요. 저 바디메오가 처해 있던 상황이, 오늘날 한국에 장애아들의 상황과 어쩌면 저렇게 닮아 있는지 모르겠네요. 음성 기능은 200자로 제한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