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안할 그 때 하나님의 징계를 기억하라. *** 오늘은 지난번에 제가 이사야 1장의 배경을 설명 드리며 썼던 내용과 맞물리는 내용이기에 조금 반복되는 부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시작하기 전에, 인간의 편의와 암기를 위해 그저 통으로 씌어졌던 하나의 문서와 서신인 성경을 장과 절로 나누어 놓은 폐해로 인해, 문맥을 보지 못하게 하는 현대 교회들을 만들어 놨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9장을 이해하려면 바로 전 장인 18장과 이사야서를 통해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19장 1절에, 히스기야 왕은 산헤립왕의 신하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두르고’ 주의 전에 들어가는 것으로 통회의 예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이토록 통회의 예표를 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원인을 알려면, 19장만 갖고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즉 18장을 보지 않고 19장만 보고 말하게 되면, 산헤립왕의 협박 때문에 두려워서 그랬다고 해석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왕이 그렇게 협박을 할 수 있도록 원인과 빌미를 제공했던 것은 히스기야 자신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축복받은 좋은 왕이라고 배워왔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렇게만 볼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 열일곱 개의 선지서에서 하나님이 지적하시고 책망하시고 징계하시는 사람들의 죄는, 1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를 지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과 여건을 만들어놓은 왕들의 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상의 제단을 만들어서 그것을 섬기는 일을 시작한 것도 왕들이고, 백성들은 그런 왕의 모습을 그대로 본을 삼았을 뿐이었지요. 또한 왕이 자신을 위해, 제물을 쌓고 늘리는 일에 백성을 착취하고 돌보지 않고, 그것을 지켜본 사회 지도층들도 왕과 똑같이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였기 때문에, 모든 선지서는 바로 이러한 행위의 과정들을 통해 그들의 악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시고, 그러한 악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징계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선지서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랑하기 위해 창조하셨고, 그래서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저 백성들에게 죄를 짓게 만들고, 그들을 고통과 괴로움과 배고픔에 빠지게 만드는 왕들과 지도층의 죄악을 책망하시는 것이 선지서들을 기록한 1차적 목적입니다. 따라서 히스기야왕 때에 전체 사회적 상황을 알려면 우선 그 당시 선지자였던 이사야의 글을 읽고, 바로 그 관점에서 역사서를 이해하고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을 보면,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단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라고 말입니다. “너희가 소돔과 고모라의 짓거리를 하면서, 너희의 수많은 희생제물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숫양과 수송아지들과 어린 양들과 숫염소들의 피를 기뻐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 앞에 나타날 때 너희 손에 이것을 가져와 내 뜰을 밟으라고 누가 요구했느냐? 헛된 예물을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게 가증하다, 매 월 첫 번째 안식일들과 집회들을 모으는 것도 내가 견딜 수 없으니, 심지어 엄숙한 모임까지도 악한 것이다. 너희의 매 월마다 정해놓은 명절들을 내 혼이 싫어하며, 그것들은 내게 짐이기에 내가 지기에 피곤하다. 너희가 너희 손을 내밀 때면 나는 너희에게서 내 눈을 가릴 것이다. 정녕, 너희가 기도를 많이 할 때에도 내가 듣지 않을 것이니 이는 너희 손은 피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씻고 스스로 깨끗케 하라. 내 눈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을 행하는 것을 그쳐라. 선을 행하기를 배우고 공의를 찾으며, 압제당하는 자들을 구해 주고, 아비 없는 자를 판결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이제 우리 한번 따져보자. 너희 손에 그토록 죄들의 피가 주홍 같이 얼룩져 있는데 눈같이 희게 되겠느냐.? 진홍같이 붉은데 양털같이 되겠느냐.? 너희가 자원하고 순종하면 땅의 풍요함을 먹을 것이나 너희가 거절하고 반역하면 칼에 삼키 울 것이다, 이는 주의 입이 그것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자, 히스기야 같이 좋은 왕이 다스리는데, 왜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저토록 격노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우선, 역대하 29장에서 31장을 보면, 히스기야가 25세에 유다의 왕이 되고 초기에는 자신의 부친인 아하스를 비롯해, 유대와 북이스라엘에 선대왕들이 망처 놓았던, 신앙적, 사회적, 정치적인 모든 면을 새롭게 개혁을 합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성전을 복원하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통해, 성전을 깨끗이 하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하고, 율법에 기록된 그대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통해, 자신과 모든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고, 하다못해, 백성들이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을 보고, 그것도 깨 부습니다. 두 번째, 모든 우상의 근원 국가인 앗수르에게 등을 돌립니다. 이유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려면,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대왕국을 지키셔서 전쟁 없이 약 14년을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후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열왕기하 18장 13절부터 16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맙니다. 앗수르의 산해림왕이 자신을 배신한 유대로 처 들어왔는데,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도 안 해보고, 앗수르 왕에게 굴복해서 요구하는 데로 주겠으니 돌아가 달라고 말하고, 앗수르 왕이 요구한 물량만큼 자기 왕궁 창고에 있는 은을 다 갖다 바치고,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님 성전의 문과 기둥에 자기가 입혀놓은 모든 금을 뜯어다가 그것까지 앗수르 왕에게 바쳐 버립니다. 그런데, 그렇게 갖다 바치면 물러갈 줄 알았던 앗수르 왕은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렇게 많은 조공을 받고 보니 더 큰 욕심이 났던 거지요.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스스로 갖다 바친 것이 이 정도면, 더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예루살렘성 가까이까지 처 들어와서 위협하는 앗수르 왕의 말을 듣고서야 자기 잘못을 깨달았고 정신이 들어서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찾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오늘 본문 열왕기하 18장부터 20장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그 때 그 기도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는 기적을 통해 앗수르 왕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해주시고, 그 때부터 이스라엘이 부하고 강한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히스기야가 죽을병이 들게 되는데,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15년이나 수명을 연장해 주시겠다 하시며 그 증거로 지구의 자전을 10도 뒤로 돌리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열왕기하와 같은 사건을 기록한 역대하 32장 24절~31절을 보면, 진짜 문제는 이 사건 이후부터 시작 되어졌다는 걸 암시하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24절~31절) 32:24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므로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고 또 이적을 보이셨으나 32:25 히스기야가 마음이 교만하여 그 받은 은혜를 보답하지 아니하므로 진노가 그와 유다와 예루살렘에 내리게 되었더니 32:26 히스기야가 마음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예루살렘 주민들도 그와 같이 하였으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히스기야의 생전에는 그들에게 내리지 아니하니라 32:27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지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32: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산물을 위하여 창고를 세우며 온갖 짐승의 외양간을 세우며 양 떼의 우리를 갖추며 32:29 양 떼와 많은 소 떼를 위하여 성읍들을 세웠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재산을 심히 많이 주셨음이며 32:30 이 히스기야가 또 기혼의 윗샘물을 막아 그 아래로부터 다윗 성 서쪽으로 곧게 끌어들였으니 히스기야가 그의 모든 일에 형통하였더라 32:31 그러나 바벨론 방백들이 히스기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그 땅에서 나타난 이적을 물을 때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나시고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더라 이 구절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시고, 그 증거로 지구를 10도 반대로 돌게 하시는 이적을 보여주셨는데, 히스기야는 겸손하게 낮아지긴 커녕 교만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지요.. 히스기야가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었던 이유가 27절부터 30절까지 언급되어 나오는데, 문맥으로 보면, 부와 영광이 너무 많아져서 창고를 지었는데, 창고 하나를 지어서 거기에 다 넣은 것이 아니라, 각각에 품목을 따로 저장하려고 창고도 각각 따로따로 지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31절을 보면, 바벨론의 방백들 곧 바벨론 왕이 이스라엘에서 일어났던 이적에 대해 소문을 듣고, 자세하게 알려 달라고 편지를 보내왔는데, 히스기야가 뭐라 대답하는지 시험하시려고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떠났다 하시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열왕기하 20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간략히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왕이 물어봤던 이적이란 지구의 자전이 반대로 10도 돌아간 일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를 물리치고 물질적으로도 풍부해졌는데 히스기야는 그것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교만에 빠져서 바벨론 왕이 보낸 신하들에게 자기의 보물 창고와 무기고까지 열어 보이며 자랑을 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 노하시게 되고, 히스기야의 그 교만함과 경솔한 언행이 결과로 작용해서,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하여 바벨론과 동맹을 맺으면 유대만 환난을 당할 것이고, 유대 선왕들이 모아 놓은 궁중의 모든 보물이 바벨론으로 약탈 되어가고 하나도 남지 않을 날이 곧 올 것이고, 너의 아들들 중에서도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아들이 있을 것이며 네 아들들이 거기서 그 나라 왕을 섬길 것이다.” 라고 예언하십니다. 바로 이게 31절에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로 저렇게 부강한 나라가 되었고, 그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도 평온해지고 안락해져야 하는데, 왜 이사야 1장에서 아래의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여기서 한가지 유추해봐야 할 부분이 있는데요. 앗수르의 왕에게 조공으로 바치려고 하나님 성전 문과 기둥에 입혀놨던 금을 벗겨내고, 자기 창고에서 은을 다 꺼내서 앗수르 왕에게 줬는데, 그러면 그렇게 축낸 재물들을 다시 채워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대답이 이사야 1장에 있지 않을까요.? 1장 16절~17절을 다시 읽어보세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나라가 부강해지면 질수록 부정부패와 사리사욕과 불의가 멀어지거나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이 발생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16절~17절로 이전 구절들과 18절 이하 구절들을 들여다보면,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렇게 살지도 않고, 도둑과 같이 저들의 것을 빼앗아 너희들의 배만 불리우고, 그렇게 착취한 것을 가져와서 내게 예물로 드리느냐. 대체 그것은 누구를 위해 드리는 것이냐, 결국, 너희들은 나의 명령인 사랑은 다 버리고, 너 자신을 위해 그 예물을 내게 갖다 바치며 나의 복만을 구하고 있는 것 아니냐.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자 이제 우리 서로 따져보자. 그렇게 가증스러운 제사로, 피로 붉게 물든 너희의 죄가 눈처럼 희어지고 양털 같이 희어질거라 생각하느냐.”... 바로 이 뜻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18절을 저렇게 해석하느냐 하시겠지만, 히브리 원어로 저 구절은, 현재 완료형이거나 미래 예측형이 아니라, 의문형입니다. 다시 말해, “희어질 것이요”나, “희게 되리라”가 아니라. 전체적 문맥으로 봐도 “희어지겠느냐?”, “희게 되겠느냐?”.. 이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1장의 결론이 심판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29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30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31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 본문의 전체적 문맥은 무시하고, 단순하게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흰 옷’을 입은 성도들에 관한 가르침만을 생각하고 18절을 읽으면 위의 개역성경의 번역이 자동으로 나오지만,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질문형으로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옭게 바라보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특히 그들의 죄가 주홍, 진홍 같다는 표현은, 신약의 가르침처럼 모든 인류의 죄인 된 상태를 말한다기보다는, 15절의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면"을 떠올려야하기 때문이고, 이는 그들이 행하던 사회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착취하고 고아와 과부의 고통을 외면하여 약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죄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9장은 바로 이런 일들의 전조적 사건일 뿐입니다. 왕하 19장에서 하나님은 앗수르의 산해림왕과 그의 군대를 천사를 보내 멸하십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두 가지의 뜻이 있는 하나님의 무언의 말씀이라 보는 것이 옳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심이라고 바라 볼 수 있지만, 또한 타락한 백성들에 대한 경고로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우리의 죄에 대해 아무 징계가 없으면 그것이 평온이다. 생각하고 안도하고, 심지어 죄 아니다라고 말하고,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말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기만과 스스로 속이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