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바라본 사랑, 사도요한이 바라본 사랑. (수정)

예슈아의 사랑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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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바울이 바라본 사랑, 사도요한이 바라본 사랑. (수정)
Level 10   조회수 1280
2013-02-26 09:10:39
  
사도바울이 본 사랑, 사도요한이 본 사랑...
 
언젠가 내가 썼던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의 사랑을 설명하는 논법과 방법이 틀리다"...라고,
오늘은 이 부분에 관해서 성경을 통해 조금 생각해 보려고 한다...
 
 
사도바울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설명과 논법..
 
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3: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3: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립보서 3장 3절~9절)
 
위에 말씀에는 사랑이란 단어는 없지만,
사도바울이 사랑을 어땋게 이해하고 있고 또 무엇을 통해서 설명하는지에 대한 그의 기준과 매개체를 엇볼 수 있다.
이것은, 할례를 중요시 여기며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강요했던 일부 빌립보교회의 유대인들에게 경고를 하며,
자신도 바로 그 모든 율례를 지켜왔던 유대인임을 말하며 율법의 의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하는 5절에 말씀을 통해서다.
바울서신 전체를 통해 보면, 그의 복음전파의 매개체는 "예수를 통한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에 대한 설명 "일 것이다.
 
이 말은,
바울이 설명하고 논하는 사랑은,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이들의 실행적 삶이여야 하며, 사랑이 율법의 진정한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바리새인이었기에 율법을 배워왔고, 자기 배운 그대로 '흠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행하며 산 사람이 바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레위기의 이 말씀을 어려서부터 달달 외우고 있었을 것이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장 18절)

 
그래서 바울은 바로 저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이들의 실행적 삶으로서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장 8절~10절)
 
즉, 구원은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를 통한 그 구원을 믿고 성령 받은 이들은 율법을 지키는건 필수이며
그것을 지키는 방법은 곧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좀더 깊이 들어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네 자신과 같이'..란 말이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알면서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네 자신과 같이'..라고 번역 되어 있다고 해서, 자기자신을 사랑해도 된다고 착각하고,
설교 시간에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저 말씀의 의미와 뜻은 절대 자애를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또는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짜 뜻이거나
또한 자기를 사랑해도 된다는 뜻도 아니고, 최고의 절대 사랑을 말씀한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자애가 본성이 되어버린 타락한 인간의 속성을 감안하신 하나님의 양보와 배려의 말씀이란 것이다.

레위기의 같은 19장으로 돌아가 본다..
 
19: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장 34절)
 
34절에는 18절를 더 자세히 설명하듯 말씀하고 있다.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라고..
저 말씀은, 한 부모의 몸에서 낳은 자와 같이, 즉 떼어 낼 수 없는 네 몸의 일부로 사랑하라는 뜻인 것이다.
바울도 저 말씀의 뜻을, 로마서 12장 4절~5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2절~28절에 더욱 확실하게 풀어서 말하고 있다.
교회와 믿는 이들은 예수의 몸에 붙어 있는 각 지체라 말하면서, 실행적 사랑의 결정체라 부를 수 있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구약의 저 말씀을 모태로 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몸의 일부요 지체이기에
따라서 자기 몸의 붙어 있는 또다른 지체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현대 목회자들은 구약의 저 말씀이 어째서 자기를 사랑해도 된다는 뜻인듯 가르치고 있는가 말이다.
왜 어째서 예수의 종이란 목회자의 입에서 사람 타락의 원인인 사탄의 말이 그대로 나오는가.?
도대체 누구의 말을 생각도 없이 그대로 구관조처럼 따라하고 있는가.?
그렇게 가르치니 믿는다 하는 이들이 뭘 배우겠으며, 그런 믿는 이들을 향해 세상이 '사랑이 없다' 말하는 것이고,
가식과 위선자들이라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알아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사탄의 교묘한 거짓을 그렇게 가르쳐 놨으니. 그들의 삶이 어떻겠는가?
봉사를 해도 자기 손해 보지않을 것만 골라서 하고, 무슨 일을 하다가 자기에게 손해 될 것 같으면 피하고 도망가는
그런 사람들을 만들어 놨다 이 말이다.
과연 그게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봉사요 사랑인가? 그런 사랑은 예수 안 믿는 세상 사람들도 다 한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정독으로 다시 읽어보라.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13:8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13: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3:10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자, 위에 말씀에 구절구절 어디에 자애가 있는가.?

사도바울은 말한다. 내 모든것을 주는 구제 자체도 사랑이 아니고, 내 생명을 걸고 하는 그 일 자체도 사랑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저것들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것은 do, have, play의 문제가 아닌 for의 문제이다.
즉, 누구를 위한 것이냐.. 그것이.. 그 일을 사랑이냐 아니냐를 결정 짓는다 이 말이다..

만약 사도바울이 구약의 저 말씀을 자기를 사랑해도 된다는 뜻으로 받았다면 결코 저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자기를 위해 하는 일도 사랑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바울은 5절에서 명확히 말한다.
'사랑은 자기를 위해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이래도 계속 자기를 사랑하라고 가르치겠는가.?

자, 이것이 사도바울이 구약을 통해 바라보고 설명하고 있는 사랑의 정의다.

전에 쓴 글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중에 가장 기본은 '나를 사랑하시는 그 분의 사랑을 믿는것'..이라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향하신 그 분의 사랑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안에서 모든것을 바라봐야 한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겠는가? 그리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믿지 않고 있다는 반증이고, 곧 그것이 인간 타락에 원상인 자애와 불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로 느끼고 바라보고 받아드려야 하냐는 질문을 할 것이다.
자기 자신은... 내가 사랑해야 할 다른 그 누군가를 위해서... 그리고 그를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
내 영과 혼과 마음과 몸과 뜻과 의도와 모든것을 온전하고 깨끗하게 지키고,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과 힘으로 보살피고 다듬고 삶으로 만들어 가는 소중한 존재이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오직 다른 이를 위해 사는 존재란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신 달란트(나이와 시간에 따라 개인에게 변화된 상황속에 있는 모든 일들)는
내게 사랑하게 하시려고 준비케하신 것들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하셨고 준비해 가고 계시듯이 말이다.
바로 이 의식을 갖고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권면데로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해 자력으로 일 하라'.. 한 말처럼, 자기의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이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닌, 내게 사랑하게 하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하는 목적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자아 정체성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의 참 모습이며
예수님의 새창조의 역사 속에 있는 사람의 사람된 자아 정체성이다.
자기 자신은, 하나님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줄 것이기에
내가 스스로 나를 사랑할 필요와 이유가 없다...
 
 
사도요한의 사랑에 대한 이해와 설명과 논법..

사도요한이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설명하는 논법과 방법은 사도바울과는 다르다..
바울이 구약의 율법을 통해 실행적 사랑을 말했다면, 요한은 바울이 말했던 그 사랑을 실행할 수 있는 원천적이고.
근본적인 능력과 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사도요한의 표현 그대로.. 자기가 본바요. 들은바요, 만진바 되신.. 그 분..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신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로 사도요한은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바로 그 예수가, 바로 그 사랑의 능력과 힘이 되셔서 우리로 자기의 온전한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시는
원천이요, 근본이심을 사도바울을 보완해서 사랑을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도바울은 구체적 언급이 없다.
그러나 바울서신 전체적 흐름을 안다면 왜 언급을 안했는지 알 수 있다.
바울서시는 이미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은 이들을 향해 씌여진 편지이기 때문에, 사랑의 능력과 힘의 원천이 예수임을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요한은 약 90년 가까이 성도들을 지켜보면서 보고 알았을 것이다.
사랑은.. 온전한 사랑은.yeshua›은 성도의 힘으로도 이루기 불가능 하다는 사실과.
오직 예수가 같이 하셔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부분은 길게 말하지 않겠다. 내가 이미 작년에 이 홈페이지에 써놓은 극eshua가 있기 때문이다.
 
1.
서로,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떠한 빚도 지지 말라
 
2.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마지막 계명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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