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4장 23절~28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갈라디아서
5장..]
5절~6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6절~23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에베소서 2장 14절~22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골로새서 1장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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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의 사랑으로 다시 묵상하는 산상수훈, 팔복의 일곱번째 복, 마태 5장 9절,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을 묵상하려
한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흔히들, 마태 5장 9절을, 해석하고, 설명하면서, 악과, 불의와, 그릇된 것들에 대해서, 비판도 대항도 하지
말고,
무 저항적인 자세로, 그대로 둔 상태로, 좋게 좋게 타협해서 지내게 하는것, 이런 식으로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 이들이
있다.
허나, 그런 해석은 죄를 묵인하고픈 인간들이 자기 합리화로 생각하는 해석일 뿐,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의미의 화평을 말씀한 흔적은
없다.
만약 그런 해석이 맞는 해석이라면,
화평의 복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의를 위하여 핏박받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을 것이며,
또한, 바리세인과, 사두게인, 또, 당시 로마의 집권세력과의 결탁과 야합은 못하더라도,
타협이라도 하셨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그들의 잘못과, 그릇된 것들을 지적하시고, 비판하셨기에, 십자가라는 죽음의 과정을
겪게 되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화평은, 결코, 그런유의 화평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태
5장 39절의 뜻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말이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이 말씀의 뜻은, 악과, 불의, 자체를 말하는게 아니다..
악과 불의에 붙잡혀 있는
사람을, 대적하지 말라는 뜻이지, 악과 불의를, 그대로 묵인하거나, 방관하거나, 받아주라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저
구절은, 상대가 갖고 있는, 악의 의식과, 구조와, 상황과, 여건을.. 예수의 사랑으로, 왼뺨을 돌려대는 행동으로, 고쳐 나아가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저 팔복의 구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또다른 부분이 있다..
"천국을 소유, 위로를 받음, 땅을 얻음, 배부름, 긍휼을 입음, 하나님을 봄,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움.."
이것들 자체를 목적이요, 이것들 자체를 복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누리는 개인의 복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헬라어 원문의 문장과 문법으로 들여다 보면, 저것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실천과 행위의
결과이지, 결코 목적이나 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목적과 복은, 저 결과들 전에 말씀하신 것들이다.
즉,
첫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게 복이다.
두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내 몸에 한부분으로, 그의 고통과 함께함으로, 애통하는 자가 되는게 복이다.
세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그의 고통을 알기 위해, 스스로 낮아진 온유한
자가 되는게 복이다.
네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그를 위한 의를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되는게
복이다.
다섯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그가 의와 사랑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려고, 창자가 들끓는 고통의 긍휼을, 소유한 자가 되는게
복이다.
여섯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그를 생각하는 것 조차, 조심해서 하고, 내 모든 의도와, 잠재의식까지 청결한 자가 되는게
복이다.
일곱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이 모든것으로, 그를 사랑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어, 그를 평안케 하는 자가 되는게 복이다.
여덟번째,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바로, 이 모든것으로, 그를 위해 그를 사랑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의이를
나타내어 보여주므로, 세상에 사탄의 거짓된 사랑을 들어내어,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가 되는게 복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 하나님과 같은, 온전함을 이루는 유일한 방법과, 길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진정한 복이기
때문이다.
저와 같은 복의 사람이 되어서, 저 모습으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바로, 저 일곱가지의 결과란 것을 명심해야
한다..
좀 더 깊이 들어가서, 바로, 저 구절들은, 다른 이에게, 저와 같은 복이 되어 주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내가 복이 되어준 그에게도, 또다른 이에게, 그런 복이 되어주는 자가 되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복의 근원이요, 복의 시작이신, 예수께서, 내게, 그리고 당신에게 주신, 사랑과, 복의 목적과, 이유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
구절들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로, 이 계명과
같은 맥락이고, 그것에 대한, 구체적 설명과,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까지, 은사주의자들과, 그들의 가시적 성장만을 추종하는 많은 목회자들은, 마태 5장 3절~10절만을 따로
떼어 말하면서,
저어 여덟개의 각 구절의 끝 부분을, 목적과 주어라고 가르쳐왔고,
"현재 한
개인에게 속한, 신앙, 생각, 상황, 조건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소유한 개인에게 상으로 주어지는 복이다." 라고 가르쳐
오고 있는게 현실이다.
허나, 그것은,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헛개비로 만들어 버리는 짓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저어 여덟가지의 복의 사람에 대해 말씀하시고, 곧바로 13절에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만약, 저들의
말대로, 저 구절들의 끝부분들이 목적이요. 개인에게 속한, 냇적 욋적 상태로 인해, 주어지는 개인의 복이라면, 13절은, 대체, 어찌 해석하고
봐야 하는가. 저런 해석 때문에, '세상의 소금'이란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처한 상황과, 삶의 조건으로,
개인에게 주어지는 복이라 보기에, 저 여덟 구절과, 13절부터 이어지는 말씀을, 완전히 이질적 구절로 동떨어지게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또 언급하겠지만, 소금의 특성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이미 다 알듯이, 소금의
특성은 맛을 내는 것과, 부패와 변질을 방지하는 특성이 있다.
자아 그렇다면, 저 팔복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서 13절을 보면, 13절은
어떤 뜻으로 볼 수 있을까.
"너희가 이러한 복의 행동으로, 사람들을 위해, 세상에 맛이 되어야 하며,
또한, 그들을 위한, 너희 행동의 목적과 이유가 변질되지 않게 하라."
이렇게 바라봐야 저어 팔복도, 13절 이하 구절들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헬라어 원문의 단어부터 알아보기로 하겠다.
“화평하게 하는 자”에 해당하는 단어는 “호이
에이레노 포이오이”(ο? ε?ρηνοποιο?) 라는 말이다.
이 말은, “평화”, “화평”(peace)을 의미하는,
에이레네(ε?ρ?νη) 라는 단어와,
“만드는 자들”(makers)을 의미하는, 포이오이(ο? ποιο?) 라는 단어를 결합한
합성어이다.
다시 말해, 이 말은 화평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화평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즉, peace makers 라는
의미이다.
지난 글에서 계속 말했듯이, 산상수훈의 서두인 저 팔복은, 각각 떨어진 구절들이 아니라, 서로 이어 받는 구절들임을
잊어선 안된다..
저 팔복을 서두로 말씀하신 이후, 마태 5장 13절부터 이어서 하신 말씀은, 우리를 위해 행하시고, 완성하신, 예수
자신의 계명(요 13:34), 곧 그 사랑을 행하는 구체적 방법을, 가르쳐주신 말씀임을 알 수 있기에, 결코, 따로 떨어진 구절이 아니란
말이다..
오늘 묵상하고 있는, 5장 9절도 마찬가지다. 이 구절은, 이전 여섯구절들을 완성한 결과의 한 부분으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를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가 되어 주어야 하며,3절..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아픔과 슬픔을, 내 몸에 한부분으로 같이 애통하는 자가 되어 주어야 하며,4절..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의 힘겨움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낮아진 온유한 자가 되어 주어야
하며,5절..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를 위한 의를,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되어 주어야 하며,6절..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도 의와 사랑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기 위해, 창자가 들끓는 긍휼을 소유한 자가 되어 주어야 하며,7절..
그러기 위한 방법으로, 그를 생각하는 것 조차, 조심해서 하고, 내 모든 의도와 잠재의식까지 청결한 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8절..
바로 이것이, 9절의 뜻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위한 화평을 이루는
사람이다.
또한 예수의 사랑으로 상대를 위한 화평을 만들어 가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제자이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인 10절의
뜻도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런 화평을 이루웠는데 왜 핍박을 받을까.
위에서 나열한 저 복의 행동은 결코 권력과 돈과
자기만의 의를 가지고 낮고 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그런 교만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닌, 바로 그런 자들에게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받는 핍박이란 것이다.
여기서 우리 한번 깊이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화평, 또는, 평안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다음 구절에서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요한복음 14장 26절~28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그 성령으로, 나와, 우리와 함께 하실것을 약속 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평안을 준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단순히, 요한복음 14장 27절을, 성령을 보내주시겠다 하셨기에, 성령이 주시는 평안이라
생각하고 해석하려 든다..
물론 틀린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위에서 나열한 팔복에 대한 설명과, 저어 복의 행동들을 놓고, 저어
27절을 들여다 보면,
두가지의 더 깊은 뜻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예수의 화평(평안)은, 상대를 위해,
그에게 나 자신을 내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예수님은, 피조물인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아 스스로
죽으신다.
진짜 참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의이와, 자신의 진짜 사랑과,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게
죽으신다..
즉, "내가, 너희를 위해, 죽어야, 너희가 평안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그 분이 주시는 예수님의 평안이다.
[에베소서 2장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곧, 예수 자신이 곧 그 화평이시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한, 그 어떤
의도가 없으시기에, 우리가 평안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관점에서, 저 27절을 보면,
"나 자신을 너희에게 준다. 나는
세상과는 다르다. 나를 위한 그 어떤 의도도, 그 어떤 조건도 없다. 그렇기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
바로 이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 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세상의 화평은, 늘 조건이 붙는다.
'니가 이렇게 하면, 나도 이렇게 할
것이다.' 라고 말이다.
국가간의 각종 조약도, 사회적 규범도, 개인간의 약속도 바로, 이 조건이 깔리고, 실행 될 때,
화평이란 말이 성립이 된다..
그리고, 그런것들을 통해, 인간의 오감을 충족시켜 줄 때, 그것을 인간애라고 한다..
그런데,
국가간의 평화 조약은 맺어놓고서, 시시때때로 서로를 감시 한다..
사회 규범은 만들어놓고, 저 사람이 먼저 지켜야, 내가 지키려
한다..
개인간의 약속은 해놓고, 그 약속에 대한, 심리적 부담감과 압박으로 짐스러 한다..
과연, 저런것이 저이를 위해 저이를
사랑하는 진짜 사랑일까. 또한, 과연, 저런것이 진짜 화평일까..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것과 같지 않다." 라고,
예수의 화평은, 또, 그 사랑은, 그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다만, 예수의 사랑의 화평은 나를 화평의 사람으로 회복하시고 창조하신다.
그래서 또다른 사랑을, 화평을, 이루게
하신다.. 그것이, 저 산상수훈과, 팔복의 뜻이며, "요한복음 13장34절"의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위에, 내 말을 보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려 드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관과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이, 무조건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보이냐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조건적일
수 밖에 없는 원인과 이유를.. 또 그 분의 사랑의 진정한 속성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묻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사랑에 조건이 붙는다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자기를 위한 계산과 의도와 조건을 깔아놓고 하는
사랑이기에 그렇다..
그것이 곧, 사탄의 거짓 사랑, 자아애(自愛)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어째서, 하나님의 그
사랑은 무조건적인가. 또 그 사랑의 동기와, 목적과,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하나님 자신을 위한, 그 어떤 계산도, 그 어떤
의도도 없는, 오로지 우리를 위한 사랑..
자아애(自愛)가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다.. 또한, 이것이, 하나님을 닮은 타락 이전에
우리의 형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조건'을 말하면서, 왜 '무조건'의 이유는 묻지도 생각하지도 않으려 하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를 위한, 사탄의 그 거짓 사랑도, 사랑이다.라고 합리화 하고, 자기의 죄의 근원을 부인하려는 그 의식이
있어서이다.
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말하면서도, 그 분의 진정한 사랑의 속성을 말하면 인간의 거짓 사랑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무 자아애(無自愛)"의 사랑이라, 말을 못하고, 무조건 '무조건'이라 말한다. 그래야 내 책임이
무마되기 때문에..
이러하기에, 바로, 저어 복의 행동들은, 위와 같은 거짓 사랑을 버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구체적 행동임을 알아야
한다..
바로 이 관점으로.. 예수의 온전한 그 사랑으로.. 나와 우리, 그리고 세상의 죄의 근원을, 바라보는 것이, 예수를
따르고, 섬기는 이의, 가치관이요, 인생관이란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결코, 여러개 중에 하나인, 기준도,
잣대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본질적 형상을 증거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에 의해, 그 형상으로 똑같이 창조된, 인간의 진짜 본질을
말하는 것이다..
두번째, 예수의 화평(평안)은, 하나님안에, 예수안에, 우리안에, 서로 안에서, 하나를 이룰때, 창조되는
화평(평안)이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한글 킹제임스 성경, 요한복음 14장 19절~21절..
그 날에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되리라..
나의 계명들을 가지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의 아버지께 사랑을 받으리라.. 또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 사람에게, 나 자신을 나타내리라." 고
하시니라..
라고 하신다..
그리고, 27절에서 평안을 준다고 하신다.. 이게 무슨 말인가. 다시
말해..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성령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고, 예수와 하나 되고, 내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내어주므로, 예수의 사랑으로, 상대와 하나가 될 때, 더 나아가, 내가 사랑한 그도, 예수와 하나가 되게 할 때,
창조 되어지는 사랑의
평안이란 것이다..
예수의 화평(평안)은, 나 혼자 편하고, 안락하면, 끝나는게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의 사랑은, 또 그
분의 화평은... 상대가 평온해야 비로소 내가 잠이 온다..
수 많은 은사주의자들과 목회자들이, 툭하면, 성령충만 성령충만을 외쳐댄다. 그런데 대체 성령충만한 믿음이
무엇인가.
'라랄 라랄 라랄' 하며 방언이나 하고, 교회 건물에 얼굴 잘 내밀고, 십일조니 건축헌금이니 헌금이나 잘 하고, 담임목사 말 잘
듣는게 성령충만인가.
도대체, 아래 이 말씀은 어디다 팔아먹고, 그 따위 자아애(自愛)적 의식만을 가르치는가. 똑바로
보라..
[갈라디아서 5장 22절~23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것이 성령충만한 자가 맺는 열매다. 과연 저들이 말하는 성령충만의 결과에 이러한 열매가
있는가.
만약, 이런 열매가 있다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왜 저러며, 왜 욕을 얻어 먹는가.
저 열매들을 보라, 사람들과의
무관계로, 나 혼자 맺어가는 열매가 아니다 이 말이다..
성령충만의 첫 열매도 사랑이요, 마지막 열매도 사랑이다..
우리의
믿음은, 오직 예수의 사랑으로, 걸러져야 하고, 정제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온전한 믿음이 될 수 있다.
현대 사회와, 국가속에, 각종 철학과, 사상은,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인간애를 수 없이 외쳐대고, 그것을
이루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실제적인 삶의 모습들을 들여다보면, 정 반대로, 수 많은 종류의 분쟁과,
불평등과, 억압속에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을 본다..
그렇게 수 없이, 외쳐대고, 이루려고 애쓰는, 자유와, 평등과, 평화와,
인간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이 말이다.
왜 그럴까..
오늘, 예수님은, 내게 말씀 하신다.. "니가 화평케 하기 위해, 죽지 않아서 그렇다." 라고..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 예수의 사랑으로 죽자. 그래서 서로 하나가 되자.. 그래서 우리 믿음을 예수의
사랑으로 세우자...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들은 우리를 예수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를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5절~6절..]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오직, 우리의 믿음은, 예수의 사랑으로, 화평으로 세워질 때,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 분이 거하실 수 있는 처서로 예수 안에서
지여져 갈 수 있다..
[에베소서 2장 14절~22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