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그리고 오늘, 나는 하나님으로 인해 놀라움속예 빠져있다. 내게 하게 하신 일이 분명코 하나님께로 나왔다는 사실을 더 확실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글 때문에, 성경적 방언에 관한 헬라어원문과 단어분석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찾다가 내가 운영중인 유투브페이지를 통해, 내가 올린 글의 녹음 동영상의 제목과 유사한 목록이 표출되는걸 보고 한개를 클릭해보았는데.. 내가 말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만, 처음 들은 그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신학의 모든 정의와 골자는 사랑이고, 그 사랑이 곧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임을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목사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신학은 사랑으로 이미 논문(저서)으로 정립이 되어 있고, 더이상 진행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 저서가 내가 쓴 시들과는 시기적으로 훨신 이후에 발표된 것으로 보여서 내가 따라하는 것응로도 보일 소지도 없고, 나의 관점 자체가 틀리기에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없지만, 내가 조금 의야스런 부분이 있다. 그 논문이 저서로써 출판되었다면, 국회도서관과 교보문고와 같은 큰 서점에 책에 관한 정보가 떠야한다. 그런데 전혀 발견할수 없다는 것이다.. 여하튼, 내가 놀라워하는 부분은, 내게 하나님이 하게하신 일은 결코 혼자만의 외로운 독백만을 하고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둬야 할것은 헬라철학을 비롯해 모든 철학의 시발점은 에로스(자애-自愛)이며, 그 에로스는 사탄의 거짓 사랑 자애이며, 하나님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질투를.. 현대인들이 인식하고 개념화 하고 있는 이성애의 시각으로 에로스적 사랑이라 했지만, 분명히 해야 할 일은, 그 질투 또한 하나님 당신이 사랑받지 못해서 자기를 위해 행해지는 질투가 아니란 사실이다. 슥 1:14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슥 8:2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이 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깨닫고 있던 것이고, 언젠간 이 부분에 대한 글을 쓰려하고 있지만, 오늘은 서론만 잠깐 말하겠다. 스가랴서 뿐만 아니라. 구약에 30여번이나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질투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들을 보면, 그 질투의 이유와 원인은 우상경배를 하는 인간들 때문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질투의 대상은 우상들 자체로 보인다. 이것이 표면적 이유다. 그러나, 한가지 질문이 생긴다. 분명코 우상은 생명적 실체가 없는 특정모양만 하고 있는 지물의 물과하다.. 그런데, 살아계신 생명의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이 과연 아무 가치 없는 지물이 대상일까.? 아니, 결코 그 질투의 대상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지물이 아니다. 정확히 그 대상은 바로 우리 속에 있다.. 인간이 우상을 경배하고 섬기는 진짜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 경배와 섬김의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경배의 대상의 능력을 빌려서 내가 평안하고 잘되고 복락을 누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고 그 이유다. 다시말해, 인간이 진짜 위하는 대상은 어떤 형태의 지물이 아닌, 자기 자신이란 사실이다.. 또한, 자기를 비우고 가난해지고 버리지 않으면, 살아계신 하나님도 나를 위한 우상으로 전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질투의 대상은 바로 자기애(自애)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질투하신다. "나는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였는데, 너는 너를 위해 나를 사랑하는척 한다. 나는 그것을 질투한다.".. 이것이 오늘날에 교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