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장애인 당사자주의(consumerism)에 대한 개념부터 다시 정립해야 할것 같아 몇자 적는다. 장애인 당사자주의.. 이것에 시발점은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 분의 병자들(도덕적 부자유자들도 포함)을 대하시는 태도와 그들에게 다가가시는 방법을 본을 삼아 당사자주의라 정의해 놓고, 바로 그것을 토대로 현대 미국과 유럽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에 깃틀로 삼고 있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어느 IL강사는 이 부분 즉 종교적 색체를 배제하기 위해. 어느 나라에 시설에 있던 장애인이 창시한 사상이라고 말했지만, 염격히 따지면 성경과 예수가 시발점이란 사실이다. 내가 비크리스천이라 하더라도 인정할건 인정해야 하는데. 좀 직선적으로 말해서 내게 이롭고 내 주장과 부합하는 부분만을 걸러내서 말하려는 현상이 있는게 당사자주의를 말하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현대의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이 이나마 올라와 있고, 장애인인 우리도 그 수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될 것이다. 마치 장애인 인권운동하는 이들의 농성과 데모에 의해 이뤄낸 것처럼 오만한 태도로 착각 내지는 과대 포장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이 주장하는(변질외곡된 부분도 있지만) 근본 내용은 그들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란 사실이다. 이것은 예수를 따르고 섬기는 한사람으로써 양심껏 말해야 할 책임이 있기에 하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이 글이 내가 종전에 썼던 글의 내용들과 배치되는 내용인듯 느낄 이들이 있을 것이다. 전에 썼던 내용은, 관용 없는 분노로 가득찬 질타였는데, 이 글은 왜 신앙이 나오고 예수가 나오냐..고 말이다.. 하지만, 결코 배치되지 않는다. 내 글의 중심이 되는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의 기준은 바로 예수이고 그 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곧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바로 그 기준이 예수이고, 그 기준으로 바라본 결과, 나와 사람들의 어그러지고 그릇된
모습이 보이기에, 또한 상대를 위한 참된 사랑이 아닌 모든 자애적 행위와 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있는자든 없는자든, 강자든 약자든 상관없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어느 집단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예수의 모습과 그 분의 사랑에 어긋나는 모든 대상이
나의 지적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전에 썼던 글도 그 기준으로 썼고, 지금 이 글 또한 그 기준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혹, 어떤이들은 내가 살면서 경험하고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을 신앙안에서 나 한사람 개인에 대한 훈련과 순종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라고 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 해석과 판단이 중요하다. 나는 내가 살면서 경험하고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은, 고후 1장에 말씀처럼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줄 수 있지만,
또한 같은 일을 겪을 다른 이들을 대변해 주기 위해 먼저 걸어오는 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겪음과 경험을 통해 이런 글을 쓰게 하시는 것임을 느끼고 있다. 나 혼자 겪는 일이고 경험하는 일이라면, 나 개인의 훈련을 위해 있는 일이라 해석하고 조용히 기도만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란 사실이다. 그런 부분, 곧 예수의 모습과 반하는 모든 부조리와 그릇된 일들에 대해 지적하고 잘못 되었다고 말해주고 고쳐야 할것을 권면하는 것이 선경험을 하고 있는 나의 책임이고 예수를 따르는 이에 순종이라 보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다.
장애인 당사자주의... 즉, 비장애인들만의 입장과 의식과 중심으로 생각하고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게 아니라. 서로가 모든것을 상대의 입장과 그의 시각으로 느끼고 말하고 의식하고 행동하려 하는 것이 장애인 당사자주의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명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우리가 상대에게 나를 그리 대해 줄 것을 바램으로는 기대할 수는 있으나.. 당사자인 나 스스로 나를 위해 주장하고 요구해야 될 일은 아니란 사실이다. 성경에 "대접 받고자 원하면 먼저 대접하라"는 말씀을 기억한다면, 또한 인간의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안다면, 나의 이 말의 뜻을 충분히 이해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나 스스로 자신을 위해 그것을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께는 전혀 없는 그 분의 뜻과는 정반대인 自愛이다., 오늘날 한국의 장애인들이 자기 자신을 위해 주장하는 그것과 예수님이 말씀 하시는 당사자주의는 한참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그 분의 뜻을 왜곡변질 시켜서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그것은, 상호.. 서로.. 상대를 위해 그리 하라는 뜻이지, 나 자신을 위해 상대에게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란 사실이다.
비장애인 즉 좀 나은듯 보이는 조금 다른 모습의 사람들은, 장애인 즉 좀 부족한듯 보이는 조금 다른 모습의 사람들의 마음과 뜻과 입장이 되어 배려로 헤아려서 그들의 삶의 불편과 어려움이 없도록 환경과 역건을 미리 살펴 준비해 주고. 장애인들은 비장애인들의 마음과 뜻과 입장을 헤아려서 양보와 관용과 배려로 기다려주고 이해해 주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당사자주의다..
당사자주의, 즉 "모든것을 상대의 입장과 그의 시각으로 느끼고 말하고 의식하고 행동하려 하는 것"..은... 상부상조..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바라보려 힘써야 할 정신이며 사상이지. 결코 어느 한쪽편이 우월해서 제공자가 되고, 어느 한쪽편은 열등해서 수혜자가 되서 열등한 쪽이 우월한 쪽에게 내게 그리 해 달라고 아이들처럼 때를 쓰고 스스로 요구해야 하는 사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의 뜻이 서구의 나라들 처럼 깊숙히 온전히 받아드리지 못한 우리의 사회구조와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격과 의식에도 책임과 문제가 있지만, 내가 바라보는 이런 시각으로 오늘날 우리나라에 장애인 인권운동을 보면, 미성숙한 아이들의 때 쓰는 광경으로 보이고, 이기심만 가득찬 개인들의 야심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와 같은 장애인들을 이용하고 차별하는 것이 보인다. 서로가 협력해야 할 장애인단체와 기관들 또는 개인 끼리의 싸움과 반목, 또 초심의 진실성이 의심되는 단체장들의 행보를 보면 서로가 아닌 나만 그리 바라봐 달라는 그런 집단적 이기심에서 나온 의식이 깔려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의 인격과 의식구조는 장애인인권운동을 하는 우리들도 그대로 닮아 있다는 것이다. 즉, 비장애인들에게 우리들에 대해 이렇게 바라봐 달라 요구 하면서도, 장애인 끼리도 서로 그렇게 바라보질 않고 서로 반목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면서 인권운동이라 말 할 자격이 있겠는가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