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사랑.. 나의 사랑...

미션 스페이스

글보기
아버지의 사랑.. 아들의 사랑.. 나의 사랑...
Level 10   조회수 478
2013-07-28 05:24:52
[기도]
아버지.. 이 글을 쓰려하면서 제 마음에 많은 답답함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마치, 제가 성경을 억지 해석을 하려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그들의 저의를 알기 때문에,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을 같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이 글이 잘못하면 저 자신을 위한 변론으로 변하고, 자신을 위한 도구가 될듯 싶어 두렵습니다.
아버지, 이 글에.. 주의 사랑과 긍흘의 감정만 있고, 제 감정은 누룰 수 있도록, 제 지혜와 지식에 맡기지 마시고,
제 마음과 의식과 생각이 되어 도와 주십시요.
제게 허락해주신 아버지의 진리의 사랑이 제 모습으로도 나타나서 일치함을 나타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그래서 참으로 아버지의 것임을 모두가 알게 해 주십시요...

아버지, 아멘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삶 자체가 끝나지 않을 기도이기에 아멘의 마침표는 찍지 않으렵니다.
 
-------
 
위 기도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내 글에 대해서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한다는 식으로 요한게시록 22장 끝 부분을 들어가며,
해석하지 말라는 의도로 누군가의 입김으로 내게 말을 전하는 이가 있다.
그 입김을 넣은 이가 목회자건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건.. 정중히 질문 하나만 하겠다.
성경 어디에.. "자기 자신을 사랑해도 된다"는 말이 있는가? 있으면, 정확한 구절을 대어 보라.
 
지금까지 예수의 교회라 부르는 곳에서,
'자기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성경에도 없는 말로 사탄의 속임수를 진리이냥 가르쳐 왔던건
당신들 아닌가.. 왜? 그렇게 달콤히고 부드러운 말을 해줘야 좋아들 하고, 교회에 붙어 있으니까 말이다.
 
24:27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자신에 관하여 모든 성경에 있는 것들을 그들에게 설명하시더라
(누가복음 24장 27절)
 
8:30 그러므로 빌립이 거기로 달려가니 그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는지라. 말하기를 "당신이 읽고 있는 것을 이해하느뇨?" 하니
8:31 그가 말하기를 "나를 지도하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으리요?" 하며, 빌립을 청하여 마차에 올라 자기와 함께 앉게 하더라.
(사도행전 8장 30절~31절)

위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저 말씀이 어떤 상황에 말씀인지 성경을 읽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내게 덧붙여 해석하지 말라고 했는가.? 내게 그렇게 말하는 당신들의 그 속에 있는 저의를 안다.
그건 내가 말하는 그것이 은사주의와 오순절주의를 표방하는 당신들의 주장과는 정 반대이기 때문이고,
당신들의 그 엉터리 교리에 배치되기 때문에, 당신들의 잘못된 교리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내게 말을 못하게 막아야 하고, 잘못된 것인듯 호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에 두 곳 말씀에서, 분명코 예수님을 촛점으로 두고 성경으로.. 말씀으로.. 설명하고 해석해서 가르치고 있다.
특별한 상황과 경우가 아니라면, 해석해주고 설명해주는 사람이 없이는 예수에 대해서 알 수 없는게 타락한 인간이다.(고전 2:9)
 
당신들이 배웠던 은사주의적 신학에선 가르친적이 없어서 깨닫지도 해석해 낼 수도 없는 부분이기에,
내가 성경에 덧붙여 해석하는 걸로 보일것이 사실임을 나는 안다.
허나. 분명코 나는.. 구약의 십계명과 예수님의 새 계명을 기준으로 성경 전체적 맥락을 놓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나와 같은 맥락의 말을 했던 사람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는 1930년대 루터교 총회 초대의장이요, 개역신학의 이바지 했던 스웨덴 신학자
안데르스 뉘그렌 [Anders Theodor Samuel Nygren] 이다.

그가 1편,2편으로 집필한 2권의 논문 '아가페와 에로스'가 우리 말로 번역된 적이 없기에 읽어본적이 없지만,
그 논문에서 그는..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전체 맥락을 하나님의 참사랑과 타락한 인간의 거짓 사랑 곧 자애의 싸움으로 보고,
그것을 구분짓지 않고 있는 초대교회 이후, 영지주의/공로주의/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교회들을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저 사람의 신학을 한국 신학교에서 어느 누구도 언급조차 안하고 있다.

아니, 내가 존경하는 목사님중에 딱 한분만이 주일 설교 시간에 간단히 언급한적이 있다. 그것도 27년전에 기독교방송을 통해서 말이다.
이 말은, 내가 저 사람의 신학을 배우려면 프린스턴 신학교와 같은 정통 신학을 가르치는 곳으로 유학이나 가야 배울 수 있다 이 말이다.
나는 그 설교를 듣고나서 몇년후 즉 내게 회개를 이루게 하신 스물네살 그 때, 내게 이루게 하신 회개의 기준이 바로 뉘그렌의 신학의
일부분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내가 성경을 보는 전체적 관점과 기준은 열두살 때 주셨던 십계명의 참 의미에 대한 깨달음과
CBS를 통해 들었던 그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형성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도바울과 사도요한이 그토록 강조 했던 예수사랑,, 나는 성경 전체를 오직 예수의 사랑으로만 해석하고 설명 되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게 하나님께서 내게 이 일을 하도록 청소년시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준비해오신 것임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뉘그렌의 신학은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신학을 배우고 그것을 받아서 좀더 깊히 연구 계승할 사람이 없었을 뿐더러
공로주의와 은사주의에 빠져 있는 교회들이 자기들의 그릇된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배척해 버렸기 때문이다.

공로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들의 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과 방법의 대상물로 이용하겠다는 저의가 깔려있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이나 주시는 분이고, 그 복을 받기 위해 인간은 모든 행위적 수단과 방법(사랑도, 선행도, 헌물도)으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신학이다..
 
자, 이러니..
"내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의 진리의 사랑은.. 저 계명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질 수 밖에 없고,

"모든 은사와 재능의 목적은 타인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이다",
"인간의 자애가 아닌 예수의 사랑으로만 사랑해야 한다",
"믿음을, 사랑을, 내 공로로 착각하지 말라",
"내게 사랑이 되셔서 사랑하게 하시고, 내 믿음이 되셔서 믿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이시다"
내가 하는 이런 말들이 과연 달갑게 들리겠는가.?

자신들의 가슴을 찌르기에 그것을 어떻게든 방어하고 정당화 함리화 시키기 위해,
성경 전체적 맥락으로 보면, 눈에 뻔히 보이는 당연한 해석인 것을 알면서도
뭔가 잘못된 해석인 것처럼 말 해야 하는 의도와 저의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저들의 신학엔 진정 하나님을 위한 고난도 타인을 위한 십자가도 없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 하나님마저도 인간인 자신만을 위한 도구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곧 인간의 타락의 속성인 자애라는 사실을 인식조차 못하고 있고, 그것을 인정할 경우,
자신의 잘못된 신념으로 얻어놓은 대형건물과 헌금과 거짓된 부와 명예를 잃게 될 것이 자명하기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들의 말로는 어떠하겠는가.? 마태복음 7장을 보라..
 
7:21 나에게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되느니라.
7: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아니하였으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며, 또 주의 이름으로 많은 경이로왹eshua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리니
7:23 그때 끹eshua에게 분명히 말하되 '나는 너희를 전혀 알지 못하니, 너희 불법을 행하는 yeshua내게서 떠나가라.'고 하리라.
7:24 그러므긥shua 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현명한 사람과 같아서
7:25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쳐도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집이 반석 위에 세워졌음이요
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으리니
7:27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치면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극심하리라." 하시더라.
(한글킹제임스성경 마태복음 7장 21절~27절) 
 
과연.. 저 말씀속에 저들이 누구인가?
자신들의 행위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라 여기고 공로라고 말하는 저들..
바로 은사주의자들과 공로주의자들의 대표라는 것이다.

자, 여기서 내게 분명 이런 질문을 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니가 말하는, 예수의 사랑으로만 사랑하라..는 그것도 행위가 아니냐, 그것도 공로화 될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질문을 할 사람들에게 이미 '새벽별의 반사경이 됩시다'.. 라는 글로 대답을 먼저 해놨다.
다시 읽어보라.
 
http://yeshua-ahava.com/board.php?board=yeshuaahava&category=6&command=body&no=1251
http://yeshua-ahava.com/board.php?board=yeshuaahava&category=6&command=body&no=1306
 
나는 묻는다..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이다"..란 해석이 잘못 된 것인가.?
저 해석이 잘못 됐다면,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동기를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어쩨서 타락 이전엔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없었는가.?
 
"인간의 타락의 속성은 자애(自愛)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진짜 사랑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이고, 인간의 자애로는 구원이 없다."..란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타락의 속성이 자애가 아니라면, 나와 당신들의 속에 들어 있는 그 죄들의 소원의 목적은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인 진짜 사랑을 완전히 상실한 존재가 아니라면, 왜 예수가 오셨으며, 사도들은 왜 그토록 행위로는 구원이 없다 했는가.?
 
"인간의 힘으로는 온전한 타주도적 사랑을 이룰 수 없고, 우리에게 사랑하게 하시는 예수의 사랑으로만 사랑하라."..는 해석이 잘못된 것인가.?
나의 저 해석과 설명이 잘못된 것이라면, 예수의 이 말씀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지난번에 쓴 글에서 아래의 말씀은 적어놓고 깜빡 잊고 언급을 못했다.. 이에 나는 다시 이 말씀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14:8 빌립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소서. 그러면 만족하겠나이다."라고 하니라.
14: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너희와 그처럼 오랜 시간을 있었는데 네가 나를 모르겠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말하느냐?
14: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믿으라. 그리하지 못하겠거든 행한 그 일들을 보고 나를 믿으라.
14:12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것이요 또 이보다 더 큰 일들을 할 것이라.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라.
14:13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그것을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아들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라.
14:14 너희가 무엇이나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들을 지키라.
14:16 또 내가 아버지께 기도하겠고, 그 분께서 다른 위로자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그가 너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시리라.
14:17 진리의 영인 그를 세상은 영접할 수 없으니 이는 세상이 그를 보지도 못하며 또한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이는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임이라.
14:18 내가 너희를 고아로 남겨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
(한글킹제임스셩경, 요한복음 14장 8절 ~ 18절)

 
이 말씀은, 작년에 로마서 13장8절을 통해 사랑을 설명 했던 글에서 이미 언급했던 말씀이며, 추가 하면서 그 내용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겠다.
 
위에 말씀에서 예수는 말씀하신다.
10절에서 "내가 너에게 하는 말들은 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아버지께서 그 일들을 하시는 것이라." ..라고 하신다.
그러고나서 12절에서 말씀하신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라고,.
그런데 이 말씀 뒤에 그럴 수 있는 조건이 붙는다..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이 명령을 주신 후에,
하신 말씀이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위에 말씀에서 "내가 하는 일"과 "보다 큰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며.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주최가 누구냐는 것이다.
13절~14절에 두번 반복되는 말씀이 있다. "내가 행할 것이다"..라는 말씀... 이 말씀을 10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라..
"내가 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고, 또한 그 일을 너희 안에서 내가 행하리라.".. 이 뜻이란 것이다..
 
그러면서 연이어서 15절에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듯한 말로 다시 반복 하신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2절에서 말하는 '일'은, 15절을 보면 알 수 있다. 곧 그 일은 사랑의 동외어라는 것이고, 그것을 행하는 주최는 예수 자신이란 것이다..
자, 이게 잘못된 억지 해석인가.? 한번 말해 보라..
바로 이것이, 사도요한 당시 영지주의에 놀아나고 있던 교회들을 향해 씌여진 요한복음/요한서신의 핵심이라고 나는 바라보고 있다.

사람이 그 일(사랑)을 행하는게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십자가의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신 후, 하나님께 돌아거셔서 성령을 보내실 것이고, 성령을 통해 우리안에 오셔서
그 모든것을 예수 자신이 행하시고 이루시겠다는 뜻이다..

나는, 요한복음의 저 말씀을 이렇게 풀어서 쓰고 싶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사랑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사랑도 할 것이니,
내가 아버지께 가서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어 그 분을 통해 내가 너희와 함께 할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내가 행할 것이니,
사랑하기 위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 이렇게 말이다..

자, 이러니 우리가 무슨 자랑을 할 수 있으며, 공로로 여길 게 뭐가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도 예수께서 성령으로 하시는 일이고..
개인에게 주신 은사나 사명도 예수께서 이루실 것이기에.. 결코 자랑도 공로도 될 수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새계명에는 결코 '네 몸과 같이'가 없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사랑'이다..
바로 이걸 정확히 구분을 짖지 않기에, 뭐하나 좋은듯 보이는 일을 해놓고 자기 공로와 자기 자랑을 삼게 만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나와 뉘그렌이 예수의 사랑으로 지적하고 있는 그들의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사랑은 인간의 휴머니티가 아니다.. 예수의 사랑이다.. 예수의 사랑은 자애(自愛)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의 사랑은 이것이다 말하려면 그와 반대되는 것을 지적하고 깨닫게 해줘야 할 책임이 내게도 있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내게 말한다. '사랑의 전도사는 되도 사랑의 정죄자는 되지 말라'..고 말이다.
저 말은, 내 글이 저들의 가슴을 찌르고 있다는 반증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나는 전도사도 정죄자도 아니다. 예수의 사람일 뿐이다. 또한 그리 되기 위해 예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진리이신 예수를 알고, 그의 참된 사랑을 안다면.. 그와 정 반대되는 것들을 말해주고, 오직 예수가 그 안에 계셔서 그에게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게 사랑하게 하신 이들에게 해줘야 될 마땅한 내 몫에 사랑이며, 이것이 내게 허락하신 사랑의 방법인 사랑하도록 돕는 사랑이다.
이것은 결코, 현자들이나 교황/추기경이나 노승들이 말하는 인간애 즉 휴머니티와는 거리가 멀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의 속성인 자애적 속성을 감안하셔서 모세를 통해 "네 몸과 같이"라는 인간애를 허용 하셨지만,
그러나 결코 그런 타락의 속성에서 나온 그 어떤 의식과 감정과 사상과 행위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공로는 켜녕 조건 조차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알게 하시기 위해 잠깐동안 허락 하셨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새계명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저 말씀은 분명코 사도바울의 논법데로 하나님안에서 네 몸의 일부이기에 사랑하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네 몸과 같이'..라고 했다 해서.. 자기를 사랑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건 이해력에 부족이라 치부하더라도..
어째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이 사랑조차도 예수의 그 사랑이 아닌 인간애라고 해석하고 가르븥shua이다.
 
예수님은 성경 여러곳에서 말씀하신다.
"모세가 너희의 악함을 인해서 그리 말하였으나.... 또는 모세의 율법에는 그러하나 나는 말한다.."..라고..
이런 말씀으로 미뤄보아 십계명 외의 모세5경의 기록된 사법에 관련된 부분 상당수가 모세가 갖고 있던 이집트 법율
지식이 다수 포함 됐을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뜻은 이거지만, 우리들의 죄의 속성을 감안하신 부분이 율법속에 내제되었다는 의미다.

나는..내게 허락하신 바로 저 예수의 사랑의 계명을 기준으로 성경의 모든것을 해석하려 한다. 이게 내가 할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해 하셨던 마지막 기도를 보겠다.
 
17:21 이는 그들 모두가 하나되게 함이오니, 아버지시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여서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17:22 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옵니다.
17:23 내가 그들 안에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은 그들을 하나로 온전하게 하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니이다.
17:24 아버지시여, 내가 바라오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그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게 하셔서 그들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이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옵니다.
17:25 오 의로우신 아버지시여, 세상은 아버지를 몰랐지만 나는 아버지를 알았으며, 또 이들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알았사옵니다.
17:26 또한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 알게 하였으며, 또 밝히 알게 하리니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또 내가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고 하시더라.

(한글킹제임스성경 요한복음 17장 21절~26절)
 
21절 하반절을 보라. 사람들로 믿게 하시는 게 누구신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이러한데도 믿음을 자기 의지로 가졌다하고 공로로 내세우겠는가.?
내가 믿는 것도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것 또한 아니다..
 
명심하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오로지 그를 위해 그를 사랑하려면,
진짜 사랑이신 예수가 우리안에 함께 하셔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예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모든 계산으로 하는 자애(自愛)일 뿐...
 
다시 26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어진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하고 또 내가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바로, 이것이다.. 이래서 내게 말하게 하신 "예수의 사랑으로만"이란 말이 성립이 되는 것이고,
또한 결코 그것을 사람의 의지에서 나온 행의나 공로라고 주장하거나 자랑할 수가 없는 이유라는 것이다..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을 아들(예수)안에서 이루시고, 예수의 그 사랑으로 내안에서 나의 사랑이 되셔서 예수가 이루시기 때문이다...

끝으로, 아래의 석장의 사진을 보라..

 


저 석장의 사진 중에 어느것이 이 글을 쓰고 있는 김성진 '나'인가.?
병리적 현상으로 비틀어진 자세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저것이 '나'인가.?
아니면, 전혀 어떠한 병도 느껴지지 않는 웃음과 무표정에 저것이 '나'인가.?
바로 저것이 내 삶의 조건과 모습이다.. 내 자신도 어느것이 진짜 '나'인지를 구분할 수 없는
이중삼중의 고통과 삶의 괴리를 느끼는게 내 삶이다.
 
저런 삶의 조건속에서,
과연 "하나님은 사랑"이란 말이 나오겠는가.?.. "예수의 사랑으로만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말이다..
은사주의자들 당신네 시각으로 보면, 저건 복이 아니다. 저주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속에서 저기에서 벗어나려고 온갓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 당신네들이다..

내 나이 17살 때, 은사주의를 표방하는 여의도의 모교회 목사는, 성북구인지? 도봉구인지? 집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안수를 바라고 자기 앞으로 나온 뇌성마비 장애인을 놓고,
"저 병은 마귀의 저주라 하나님도 안고쳐주신다. 데려오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면 저 사진 속에 있는 내게도 마귀의 저주가 씌인 것인가.?
 
그런데, 왜 하나님은 열두살때부터 내게 사랑을 가르치셨는가.? 겉으로 볼 수 있는 어떠한 사랑의 증거도 보여주지 않으셨으면서
왜 사랑을 그토록 가르치셨는가 말이다..
저런 삶의 조건이라면 충분히 원망과 불평, 좌절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살 수 있다는 걸,
다른 중도 장애인들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예수의 사랑으로만 사랑해야 한다.",,고...
예수가 나를 지켜보고 계시지 않다면, 자기의 그 사랑을 내안에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저런 이중삼중의 삶의 고통과 괴리를 느끼고 있는 내가 과연 그럴 수 있겠는가 말이다...
바로 지금..지금에 당신들을 위해서다.. 온전하지 못한 당신들의 그 사랑과 믿음을 바로 세워주게 하기 위해서다..

은사주의자들은 부인할 수 있으면 부인해 보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오직 나를 위해 나를 사랑하신 예수의 그 사랑으로만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9:19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인이 되었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으려 함이라.
9:20 그러므로 내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것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라.
9:21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 있지만) 율법 없는 자들에게 율법 없는 것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9:22 내가 약한 사람들에게 약한 사람같이 된 것은 약한 사람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을 구원하고자 함이라.
9: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렇게 행함은 내가 너희와 함께 복음에 동참하고자 함이라.
(한글킹제임스성경, 고린도전서 9장 19절~23절)
 
[보태기]
내가 말하는 사랑은, 신학자 뇌그렌이 연구한 부분보다 좀더 깊게 들어간 부분도 있을 것이고,
다른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맥락은, 오직 예수의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