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씀..]
[마태복음 5장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13절~20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이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6장 33절.. ]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로마서 13장 8절~10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 나는, 지지난
글에서.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제시하신 각각의 조건적 사안들은 한 개인의 현상황을 의미 하기 보다는, 이러한 조건들의 사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지라는 의미가 더 크고, 또한 산상수훈은 하나님께 어찌하라가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만나고 대해야 할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하라는
사람을 위한 사람수훈이다. 라고 말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네번째로 묵상해야 될 복, "의이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 또한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다시 묵상하려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 구절을 단순하게 불의한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라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고, 또는, 개인의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 바르고 옳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허나. 예수님께서, 저 팔복을 말씀하신 직후에 곧바로 하신 말씀들을 연결시켜 보면, 결코 개인에게 속한 도덕적
상황이나 상태를 말씀하신게 아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저 팔복을 말씀하신 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 하신다. 그리고 곧바로 율법의 완성을 위해 오신 자신의 목적을 말씀하시고,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세인의 의보다 나아야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자아, 그렇다면. 저 팔복의 조건사안들을 일반적이고 흔한 해석으로 한 개인이 속한 현재 상황으로
말하고 바라본다면, 다음 구절들인 13절~20절과는 전혀 연결이 안될 뿐더러, 산상수훈에서 아무 상관 없는, 난해 구절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저 팔복의 조건사안들을.. "이러한 조건들의 사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지라"는 의미로 바라보면, 뒤에 구절들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따로 떼어 설명하려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연, 개인이 세상에서
부유케되고, 복 받고 잘 되는게, 세상에 빛된 삶이요, 소금이 된 삶인가.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결코, 그런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빛과 소금을 의미하는게 아님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그렇다면, 산상수훈을, 내가 만나고 대해야 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신, 사람을 위한
사람 수훈이라 바라보고, 또한, 팔복을, 이러한 조건들의 사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지라, 라고 바라보면, 저 6절은 또한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그 답변은, 저 팔복의 다음 구절들인 '마태복음 5장 13절~20절'과 '로마서 13장 8절~10절'을 통해 성경적 의이의 뜻과
율법을 지키는, 참 동기와, 목적을 바라봐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성경에 기록된 한 사람의
사건을 보겠다. [마태복음 19장 16절~22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이 기사는, 공간복음 세곳에 다 기록되어 있는 기사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을 지키는 동기와 목적,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의이의 기준과, 우리 사람이, 흔히 생각하고
말하는, '율법'을 지키는 동기와 목적, 그리고, 의이의 기준이 상반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년은 마치 자기는 영생을 이미
얻어놨다는 식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자신의 의를 나타내고 영생을 확인하려는 의도로 예수님께 저 질문을 드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라고..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다. 21절을 바로 전 구절들과 비교해서 풀어서 말하면, 이 뜻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니가 영생을 위해, 율법을 지켜왔고,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고, 온전해지려고 애를 썼구나. 그런데.. 아직도 니가
너를 위해 소유하고 있는 그것들은 무엇이냐. 니가 지켜왔던 율법은 누구를 위해 지켰으며, 니가 노력했던 의로움은 누구를 위한 의이며, 누구를
위해 온전해지려고 애를 썼느냐. 율법을 지키고, 의를 이루고, 온전케 되는 목적이 너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것은, 니가 평생
삶속에서 만나야 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 니가 행해 왔던, 그 모든 행위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없이, 너 혼자만을 위한
지킴이며, 너 혼자만을 위한 의이며, 너 혼자만을 위한 온전함 아니였느냐. 다른 사람들에게 너 자신을 내어주지도 않으면서, 너 혼자 살인하지
않고, 너 혼자 간음하지 않고, 너 혼자 도둑질 하지 않고, 공경하는 척, 사랑하는 척,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온전함이냐. 그것이
의로움이냐.
욕심과 탐욕이 가득한데도 불구하고 내가 의롭게 되려는 더 큰 욕망을 위해, 도둑질 하지
않고, 누군가에 대한 죽이고 싶을 만큼에 미움을 소유하고 있는데도, 내가 의롭게 되려는 더 큰 욕구를 위해, 살인하지 않고, 생각속에
수백수천번 범하고 싶은 음욕이 꿈틀대는데도, 내가 의롭게 되려는 더 큰 욕심을 위해, 간음하지 않고, 누군가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조금이라도 뛰어나 보이면, 뭔가 뒤가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내가 의롭게 되려는 더 큰 욕망을 위해, 거짓 증언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이상적 인간이 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의 이목 때문에 좋게 대하면서도, 내가 의롭게 되려는 더 큰 욕망을 위해, 공경하고 사랑하는척 하는 그
것.. 자기를 부인해야, 나를 따를 수 있다하신 예수님은, 저 청년에게서, 바로 그런, 인간의 숨겨진 의도와 뜻을
보셨기에,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너를 버리고 나를
따르라'.이면서. 동시에, '니가 행하고, 이루고, 애썼던, 그 모든 것에, 동기와 목적'을 물으신 물음이다 이
말이다... 혹자들은 어떻게 저 말씀으로 그런 뜻을 볼 수 있느냐고 내게 물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산상수훈의 한 부분인
마태복음 6장과 누가복음 10장(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을 읽어보자. 마태 6장 1절..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 마태 6장 2절.. = 구제할 때,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부는 것, 마태 6장 5절.. = 기도할 때,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 마태 6장 15절.. =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바라는 것, 마태 6장 16절.. = 금식할 때, 슬픈 기색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는 것, 바로, 이런 모습들이, 저 청년에게서도 보였기에, 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역으로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본다면, 제사장도, 서기관도, 그 자리의 단 한명이라도, 다른 사람이 보고 있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이 된다. 자아, 과연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부터가, 예수 믿는 사람들
대부분, 저이를 위해 저이를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자체를, 하나님께 잘보여서, 나 하나 복 받기 위한, 수단과 방법쯤으로 여기고
있다. 바로, 저 청년을 통해, 예수님은 지금 우리를 지적하고 계신다.. 전에 쓴 글로 다시 반복하려 한다. 사도바울은, 인간의 죄를 율법을 통해서 바라보고 인식하고,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죄를 말하지만, 나는, 그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 바로 예수의 그
사랑으로만 나의 죄를.. 우리의 죄를 말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인간으로 죄가 무엇임을 알게 하시려고 주신것이라고는 말 했지만, 그
죄가 무엇으로부터 발생되어 나오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은듯 보인다. 허나 깊이 들여다 보면, 바울도 나와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모든 죄는 인간안에 사랑이 없어서 유발되고, 기인된 것이고, 타락의 속성인 자애가 원인임을 말이다. 그 말씀은
바로, 로마서의 이 구절이다.. [한글 킹제임스 성경, 로마서 13장 8절~10절..]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어떤 빚도 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룬 것이니라. 그것은, "너는 간음하지 말지니라, 너는
살인하지 말지니라, 너는 도둑질하지 말지니라, 너는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너는 탐내지 말지니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음이니라.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도바울은, 같은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그 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7장에서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는 나약한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13장에서 그리스도인의 대인관계에 대한 자세가 어떠해야함을 말하면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지 않는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그리고 인간에게 그 사랑이
존재한다면, 왜 어쩌서 아담 이후에 태어나고 죽은 그 수 많은 사람들중에 그 율법의 조건과 부합되거나 맞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는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 했는데, 그렇다면, 인간 속에 사랑이 있다는 말인가 없다는 말인가. 만약, 인간안에 온전한 사랑이
존재했다면, 저 율법의 조건과 부합하는 단 한명이라도 있어서 사랑이신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수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한다.
[로마서 3장 10절~12절..]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모두가 탈선하여 함께
무익하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는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다시 말해. 로마서 13장 8절~10절은,
"사랑하라"가 아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이 말이다. 즉, 저 구절은 반어법쩍 구절이며, 동시에
물음이다. "너희안에 사랑이 있느냐." 바로 이 의미란 것이다. 자아, 여기서 좀 더 깊히 들어가 생각해보자.. 사도바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인간 역사속에 율법의 행위로 아무 흠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어쩨서
하나님은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고 하셨을까. 이 질문의 대답은, 율법을 지키려는 인간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율법의 참 목적이 무엇이냐를
놓고, 바라 봐야 찾을 수 있다. 자아, 율법을 지키려는 우리 속을 한번 들여다 보자. 1. 내가 벌 받지 않으려고 두려움속에서 지키려 한다. 2. 내가 가진 사회규범적 약속 때문에 도의적 책임으로
지키려 한다. 3. 내가 복받기 위해서 또 천국가기 위해서 계산속으로 지키려 한다. 4. 내가 가진 이상을 이루기 위해 또는 그
이상을 만족 시키기 위해 지키려 한다. 그저.. 나, 나, 나.. 바로, 이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 저게
과연, 누구를 위해 지키는 것인가. 여기에 과연 사랑이 있는가. 없다. 저런 자애(自愛)적 의도와 목적으로는.. 아무리 율법을 흠 없고,
완벽하게 지켰다 하더라도,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랑꺼리도 못 될 뿐더러. 의이로 인정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다.
의인은 단 한명도 없다고.. 즉,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은, 나 자신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
지켜야 할 것이란 사실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한 것이다. 사랑만이 곧 율법의 완성 이라고.. 자아, 이제야 로마서 13장
8절~10절에 뜻을 이해 하겠는가..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라고, 그런데 예수는 말씀하신다.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것이 아닌 완성하러
왔다. 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완성하신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 온전하게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완성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자아, 여기까지 왔으면, 나는 질문 하겠다.. 인간에게 사랑이 있는가.?.. 그래서 인간
스스로 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인간이 스스로 이룰 수 있고, 온전히 완성 할 수 있다면, 예수는 왜
나와 당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그 분이 완성하신 그 사랑은 대체 무엇인가. 예수의 그 사랑은 칼이다.. 화평을 주러 온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자.. 저어 칼은, 마귀를 찌르는 칼이 아니다. 예수의 그 온전한 사랑으로 자아애(自愛)를
하는 나를 찌르고 죽이는 칼이다. 진정으로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사탄도 마귀도 아닌, 자아애(自愛)를 하는, 나 자신이다. 내가
예수의 사랑으로 죽으면, 사탄은 나를 공격할 수가 없다.. 바로 이것만이 우리가 사탄을 이기는 방법이다.. 사탄은, 이 사실을
감추려고, 세상의 학문과 목회자들의 입술을 통해, 교묘한 술수를 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남을
사랑할 수 있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와에게 했던 그것과 똑같은 거짓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13장 34절.. 내가 사랑한 그
사랑으로만 서로 사랑하라. 고린도전서 13장 5절.. 나의 사랑은 자기를 위한 유익은 구하지 않는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자아, 이제 이 말씀의 의미와 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나혼자 나쁜짓 안하고 살면, 의롭고 바르게 사는 것이다.? 아니, 절대로, 아니다. 그것이 사탄의 속임수인
자애(自愛)이다. 참으로 의롭고 바르게 살기 원한다면, 다른이들을 위한 의를 고민하고 아파해야 한다. 무엇이 저를 위한 아름답고 좋은
방법과 길인지를 고민하고 아파하라 이 말이다. 전쟁터에서 배고픈 고아처럼 빵을 찾고, 사막에서 목마름에 지처서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보는
갈증으로 그렇게 아파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양식으로 배부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서기관/바리세인들 보다 나은 의로운 예수의 제자된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태 5장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뜻을 받아 말한다.. "로마서 13장 10절,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다시 묻는다.. '율법의 의이'는 무엇인가. 아니, 하나님의 의이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또한,
계명을 지켜가는 삶이 의이라면, 계명은 무엇인가. 사랑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의이의 기준은 사랑이다.. 나혼자 나쁜짓 안하고 사는것,
그것은 의이도, 사랑도 아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다. 즉,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것은 사랑이다.. 이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며, 예수를 기다리는 기름을 준비한 자이다... [마태복음 6장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흔히, 이 구절에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영적인 것이고, "더하시는것"은 물질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그리 해석한다. 허나. 이 구절 또한 산상수훈에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마태 6장 25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말라."..
저 구절은, 문맥상 6장 19절 이전 구절들과는, 따로따로 보인다.. 하지만, 19절은, 18절의
연장된 구절이다. 다시 말해 25절과도 한 문맥이란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다. 금식할 때 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고, 조용히 혼자 있으라 하셨을까. 이다. 자아, 여기 돈 많고, 권세 있는 부자가 금식을 하며, 사람들
앞에, 그걸 들어내어, 슬프고 흉한 몰골로 거리에 서서 기도 한다. 그런데, 그 옆에 며칠 먹지 못해서 쓰러져 있는 거지가 있다. 그런데
금식하는 그 부자는 단 한품도 적선을 안한다. 거지에 입장에서 과연 그 부자의 행위가 어찌 느껴질까. 그 부자의 금식하는 그 행위 자체가
거지에게는 적대감과, 반감과, 환멸을 느끼게 되어서, 더 큰 삶의 회의와, 절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다. 과연
저 부자의 저런 금식이 의이인가.?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지적하신 것일 수 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마태 6장 33절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무엇을 구하라는 말씀일까. 나는 요한복음 14장
12절~15절에 말씀을 설명하면서, 12절에, '그 일'은, 15절과 연결시켜 사랑이라 말하면서, 13절~14절을, "너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구하든, 내가 그 일을 행할 것이다." 라고 봐야 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마태 6장 33절도 같은 관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또 다른 이들을 위한, 의이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아파하고, 구하라. 그리하면, 너에게
사랑과 의를 이룰수 있도록, 너와 그들을 위해, 저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말씀하는 의며,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제자의 모습이다. 또한, 이것이, 빛되고, 소금된 예수의 재자된 사람이다.. 오로지
예수의 사랑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