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씀..]
[마태복음 5장 7절..] 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장 38절~4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야고보서 2장 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요한1서 4장 16절~21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호세아 6장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 오늘은, 예수의
사랑(계명)으로 다시 해석하며 묵상하는 산상수훈, 다섯번째 복,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을 묵상하려 한다. 그런데 본론에 앞서, 지난
글에서 미처 빼놓고 언급을 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잠시 그 부분을 보충하려 한다.. 나는 지난 글, "예수의 사랑은, 다른 이를
위한 의를 고민하고 아파한다" 를 통해서 이런 말을 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나혼자
나쁜짓 안하고 살면 의롭고 바르게 사는게 절대로 아니다. 그것도 사탄의 속임수인 자아애(自愛)이다. 참으로 의롭고 바르게 살기 원한다면,
다른이들을 위한 의를 고민하고 아파해야 한다. 무엇이 저를 위한 아름답고 좋은 방법과 길인지를 고민하고
아파하라." 라고... 여기에 좀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다른 이들을 위해
내가 행해야 할 의를 고민하고 아픔으로 주리고 목마를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불의를 볼 때, 그들의 온전치 못한 모습에 대해서도 또한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사랑으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그의 삶에 함께 하여서 도와야
한다. 1997년 2월에 내가 첫번째 설교문으로 쓴 글에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시편 여러 곳을 보면, 시편 기자는 여러 곳에서, 이와 같이 비슷한 말을
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내게서 얼굴을 돌리시나이까...? 나의 죄가 주의 얼굴을 내게서 돌리게 하였나이다...' 이 말은, 그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죄 짓는 모습이 보기 싫으셔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그 분의 사랑 안에서 보면, 주님은 인간이
죄를 짓는 그 자체를 인간만이 겪는 큰 고통과 아픔으로 여기시고, 그 고통에 대해, 주님만이 느끼시는 큰 아픔을 느끼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인간의 모습을 차마 보고 계실 수 없고, 얼굴을 돌리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로 인해 고통
당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런 고통처럼 말이다.. 다른
이의 죄짓는 모습을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하는 그 것,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또한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인식하는 예수의 제자된 사람의 인생관이자 가치관이다. --------- 오늘 쓰게 될
내용도 바로 이 맥락에서 이어서 쓰는 내용이 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신구약성경 여러곳을 찾고, 원어적 뜻을 찾다가
한가지 중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마태복음 5장~7장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은 각 구절이 따로따로 분리된 구절이
아니라 여덟개의 구절이 마치 중간중간에 연결고리로 연결된 것처럼 서로 상호 이어받는 구절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 부분은,
팔복에 관한 묵상 글을 다 마친후에 이 부분만 따로 글을 쓰려 한다. "긍휼히 여기는자는 복이 있다.".. 마태 5장 7절,
우리는 흔히 이 구절을 해석할 때, 그져 단순히 나보다 못한자에 대한 수동적 동정심이라 말하려 들고, 그래서 중보 기도만을 강조하는 해석을
본다. 허나... 이 구절은 결코 나보다 못한자에 대한 동정심이나 연민만을 말하고 기도해주라는 말이 아니다. 이 구절은 바로 전 구절인
6절에서 이어받은 구절이다. 즉, 6절에 대한, 저 설명대로, 다른 이들을 위한 의를, 고민하고, 아파하고, 또 다른 이들의
불의를 볼 때, 그들의 온전치 못한 모습에 대해,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는 모습에 상태는, 7절로 이어서, 곧,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그들이 의를, 또한 사랑을 이룰수 있게 해주기 위해, 적극적 행동으로 나타내는 방법을 제시하신 것이다. 이
말이다.. 그 긍휼의 구체적 방법들은, 같은 5장인, 마태 5장 11절과 38절~48절을 보면 알 수
있다, [현대어성경, 마태복음 5장 11절..] 나의 제자라는 이유로, 모욕당하고,
박해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비난받을 때, 너희는 행복하다. [마태복음 5장 38절~48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1.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스스로 심령이 가난하게 된 자이고, 2.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그들의 아픔과 슬픔에 내
몸에 일부로 같이 애통하는 자이고, 3.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그들의 힘겨움을 알기 위해 스스로 자원해서 낮아진
온유한 자이고, 4.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의를 고민하고 아파하고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이고, 5. 이것이,
예수의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위해,, 의(사랑)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는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저 구절들을 보라.. 저 구절들
속에 팔복에서 제시하신 조건사안들을 소유한 예수의 진짜 제자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 하기에, 예수의 사랑은, 예수의 긍휼은.. 결코 감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와 함께 죽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이 진정한 온전함이기 때문이다. 위에 구절에서 우리가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이 있다.. 우리는 흔히, 45절만을 보고 해석하면서,
인간에 대한, 보편적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려 든다. 허나, 45절은, 하나님의 사랑의 보편성을 말씀한 것이 아닌, 그 차원보다 더 높은
가치의 차원의 사랑을 말씀하신 것이다. 46절을 헤아려 보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너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뿐 사랑이 아니다.'. 이 말씀이다.. 즉, 저 구절들에서 열거하신
행동들은, 곧 자아애(自愛)가 없어야 가능한 행동의 사랑이란 것이다. 예수님은 5장 38절부터 47절에서 예수의 제자된 자가
소유해야 할,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인생관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위에 구절들을 단 한구절로 압축
시키면 어떤 구절이며, 어떤 단어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요한복음 13장 34절, 곧 예수의 사랑이다.. 위에 구절들의 문맥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걸 볼 수 있다. "이 모든것이, 내가
너희를 위해, 너희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이며, 방법이다. 너희도 이렇게 사랑하라. 이것이
온전함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온전하심은 무엇으로 발생되고, 무엇으로 이뤄지는가. 저이를 위해 저이를
사랑하시는 사랑이다. 오직 자아애가 없는 저이를 위한, 그 사랑만이, 하나님의 온전을 더 높고, 더 큰 온전함으로 이루게하는 원천이며,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에게는 사랑하는것 자체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형상을 회복한 가장 온전한 복이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복인, 5장 7절에서 쓰인, 긍휼로 번역된 헬라어의 단어는, 엘레 에모 네스 라는 동사이다. 이
단어의 어근은, 엘레 에몬 (ejlehvmwn)인데, 저 말의 뜻은, "동정하다, 측은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듯이, 단순히 수동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에 대한 자비나 동정심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5장에, 위에 구절들로 7절을 바라보면,
세상속 가치관과 기준으로 나보다 경제력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내게 부도덕한 악을 행한 사람에 대해, 그를 위한 안타까움과 연민과
동정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바르게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뜻도 내포된 말씀임을 알아야 한다. 구약, 이사야 49장 13절~15절..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 구절은, 구약성경에서 긍휼을 표현한 구절중에, 하나님의 마음이 잘 그려진
간곡한 표현중에 하나이다. 히브리어 단어로 긍휼을 나타내는 단어는, 리하밈(rachamim)이란 말인데, 이 말은 여자의 "자궁"을
뜻한다. 다시말해, 긍휼이란, 아기를 잉태하고, 잘 자라주길 바라며, 그 아기를 위해, 극도로 조심에조심을 취하는 긴장됨이고, 심리적
고통이며, 동시에 해산을 하는 고통과도 같다는 말이다... 마치, 갈라디아 교회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바로 세워주기 위해, 사도바울이 했던
말처럼 말이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구절을 개역판 성경은, 밋밋한 느낌이 들도록
"수고"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대부분 다른 성경들은 모두 "고통"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이 말은, 곧 창자가 들끊은 고통이란
뜻이다.. 다른 이들을,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위해, 스스로 겪는 고통.. 이것이 예수님의 긍휼의
고통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긍휼은.. 자신은 아무것도 안하면서,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향해, 혀나 쯔쯔 차면서,
안됐다는 식으로, 감상적 눈물이나 흘리는 Sympathy, 즉, 동정이 아닌, 그의 고통속에 들어가, 그와 같이 느끼고, 그와 같이
아파하고, 그와 같이 동참하는, empathy, 즉, 공감이다.. 이것이, 마태 5장 7절에서 말씀하는 긍휼히 여기는
자이다... 다른 이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 하신다. 긍휼은 또다른 모습의 예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요, 형제인, 야고보는 말한다.. [야고보서 2장 13절..]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그런데, 사도요한은 말한다.. [요한1서 4장 16절~21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사도 야고보의 말과, 사도요한의 말이.. 마치 거울 두개를 맞대어 놓은 듯 보이지
않은가. 호세아서에 이 말씀을 있지 말자.. [호세아 6장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당신을 위한 제사나 번제보다.. 서로 어진 사랑으로
사랑하는 우리를 원하신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에 대한 서로의 본분과 책임이며, 하나님의 그 말씀과, 그 형상을 진리와 참임을 증거하고, 찬양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기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