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앞에 서로 함께 사랑하여 하나가 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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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앞에 서로 함께 사랑하여 하나가 될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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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4 03:22:35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 앞에 서로 함께 사랑하여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대부분 자유를 말할 때, 불교적 의식으로 ‘자신의 뭔가로 부터 벗어나 혼자되는 것이 자유’라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2장 18절에서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아담이 독처. 즉, 혼자 있는것은 옳지 않다.’라고요..

 

여기서 "독처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바드“ 라는 말인데, 그 뜻은, 일부분, 분리됨, 고립됨, 격리됨을 뜻합니다. 즉, 지금 아담은 혼자이기에 자유롭지 못하게 분리되고 고립된 상태로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혼자 있으면 자기만 느껴지고 자기만 보이니까요..

다시 말해, 아담은 자신에게 고립된 상태로 있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은 옳지 않다고 하시는 겁니다.

 

아담의 그 독처가 옳지 않은 이유는, 아담 곧 사람은, 천사를 비롯한 다른 피조물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인, 무자애<無自愛>의 사랑을, 서로를 위해 이루며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처를 하는 상태에서는 내 사랑을 받을 대상이 없기 때문에, 나를 내어 줄 수 없어서, 내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자신속에 고립되고 격리된 상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거지요. 바로 이것을 하나님은 옳지 않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는 아담에게 거기에서 벗어나도록 하시기 위해 '돕는 배필'로써, 하와를 아담 자신의 몸의 일부분인 갈비뼈로 만들어 주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돕는 배필'이란 말은 히브리어 '에제르 케 네그도', 라는 말인데요.

‘에제르’는 ‘도움’이란 명사이지만, ‘케 네그도’는 세가지 요소의 합성어입니다.

‘케’는, ‘와, 같이’ 또는, ‘와, 처럼’이란 의미의 전치사이고, ‘네그도’는, ‘마주봄’, 또는, ‘맞상대’라는 뜻의 명사 ‘네게드’와,  ‘그의(his)'라는 소유격 어미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이 말을 풀어서 다시 설명하면, '돕는 배필'이란 말은, '서로를 마주 보며, 서로에게 본이 되어 주는 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지만, 결코 아담과는 전혀 다른 독립된 개별적 존재로써, 그러나 아담과 같이 하나님의 그 사랑의 형상이라는 공통분모를 소유한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 그 어느 쪽도, 소유권이 없는, 같은 높이와 같은 위치에 있는, 이질성적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준다 이 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그 사랑은 상대를 위하는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기에, 나와 같은 것에 대한 동질성적, 즉, 자기애적 사랑이 아니라, 나와 다른 상대를 위한 이질성적, 즉, 무자애의 이타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원문에서 아담은 하와를 마주하는 첫대면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제서야 내 뼈중에 뼈, 내 살중에 살이다." 라고요. 왜 그럴까요.? 하와만이 아담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의 형상을 보여주고,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와는 나와는 다른 이질적 존재이지만, 내 사랑을 받아서 다시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는 존재, 그게 하와였으니까요..

 

그러면, 왜 하나님은 하와를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을까요.? 그저 단순하게 남자와 여자는 공평한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일까요.? 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요. 성경을 전체적 문맥을 통해 보면, 저 뜻은 곧바로 타락 이후에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의 뜻과도 연결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계명의 참 뜻이 뭔가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또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출발점이고요. 그런데, ‘네 몸과 같이’란 이 말은 ‘너 자신을 사랑하듯’이란 뜻이 아닙니다.. ‘너의 몸과 하나 된 일부’라는 뜻입니다..

 

즉, 하와가 아담의 몸에 일부에서 나왔듯이, 너희 한사람 한사람이 서로의 몸에 일부이기에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존재들이란 사실을 전제로 할 때만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개념이 로마서 12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한, 예수님의 몸에 붙어 있어서 각기 다른 기능을 하는 지체로써의 한 몸을 말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내 몸에 일부로 서로 상대를 위해서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고요.

또한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부부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형상인 그 온전한 사랑을 닮은 진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진짜 자유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다른 철학은 말할 필요는 없지만, 과연, ‘자신에게서 자유롭기 위해 뭔가로 부터 벗어나서 혼자가 되는 게 자유’ 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그 사랑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은, 혼자가 되면 자기 자신에게 더욱 고립되고 격리되기 때문에 절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왜냐면, 사람이 타락 이전의 갖고 있던 근본적 존재의 목적과 그 속성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상대를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으로 상대에게 나를 내어줄 때만이 진짜 자유와 기쁨을 얻도록 창조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자신에게서 자유롭기 위해 자신의 뭔가로 부터 벗어나서 혼자가 되는 게 자유”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면 하나만 묻겠습니다.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지려고 자신의 뭔가로 부터 벗어나 혼자가 되어서 자유를 느낀다면, 그 자유를 느끼고 있는 그 자신은 누구입니까.?

또한 그런 자유를 얻기 위한 그 모든 노력의 의도와 동기와 목적은 누구를 위한 겁니까.?

자기 자신을 위한 것 아닌가요.?

 

그런데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졌다고요.?

그러면 과연, 자기 자신을 위한 의도와 동기와 목적으로 자기에게서 벗어나 얻어진 그것이 자신을 벗어난 것이고,

진짜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더 큰 자기애로 빠지게 하는 시발점일 뿐이고, 더 큰 자기 고립에 빠지는 결과만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 형상으로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들어서 지옥으로 끌고 가려하는 사탄의 거짓 속임수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길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에 대한 질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불교의 해탈의 뜻과 같다고 말하려드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허나, 분명코 저 두 가지의 개념은 정 반대의 개념입니다.

 

불교의 해탈은.. 그 의도와 동기와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겁니까. 자기를 위한 것이 그 원인과 목적입니다.

내가 해탈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 선행과 공덕을 쌓고, 내가 해탈해서 부처가 되기 위해, 인생 무상을 말하며, 무소유를 지향점으로 삼는 것,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겁닉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 것, 즉,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 곧 "자기 죽음"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로지 상대와 내가 하나 되고, 상대를 내 안에 들이기 위한 것이 그 원인이고, 오직 상대를 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인간에겐 없어서 불가능하기에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으로 나를 죽여서 그 능력과 힘이 되시는 예수가 내 안에 사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형상의 본질적 본체이신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자기애<自愛>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분명히 해둬야 할 일은, “자기 십자가와 자기 부인”은 타락한 인간들에게 타락의 속성인 자기애<自愛>를 죽이라는 뜻이며, “그래야 내가 너희 안에서 너희를 나와 같은 모습으로 살려낼 수 있다”는 뜻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는요, 나 자신을 위해, 나를 내어 버리는게 아닙니다. 상대만을 위해 나를 그에게 내어주는 겁니다.

이게 진짜 자유이고, 사랑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그것과 같습니까.? 분명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직 예수만이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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