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자아 정체감과 자기 존엄성.. 요즘.. 글 쓰는 일이 잠시 중지 되어 있다. 사도바울이 자급자족을 위해 천막짓는 일을 했듯이 나 또한 그것을 위해 홈페이지 제작일을 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잠깐 시간을 내서 생각나는 것들을 짧게 적어놓으려 한다. 언젠가 나는 내 글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내게 쓰게 하시는 글들은 신학적 논쟁이 될 소지가 있다.".고 말이다.. 일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자기가 속해 있는 교단적 교리와 교세 확장(교인들 비유 맞추려고)을 위해 언급을 회피하고 침묵하는 그것을 내게 말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딴지 걸 사람들 때문에, 어제 올린 글을 좀더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제 올린 노래가사 끝에 적은 꼬릿말, (하나님을 떠난 타락한 사람의 사랑은 변질되고 이탈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내게 사랑하게 하시도록 나를 비워야 한다, 그럴 때, 변질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사랑할 수 있다.)
어제 올린 글. (흔히들 말하기를.. 사랑으로 인한 상처는 또다른 사랑으로 치유된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위에 말에서 빠트린게 있는것 같다.. 그것은, 그 치유의 진정한 작용이 어떤것으로 일어나냐는 것이다. 사랑을 받을 때냐.? 사랑을 행할 때냐.? 이다. 우리는 흔히들 사랑을 받을 때 그 치유가 일어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깊히 생각해보자. 예수가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하나님 됨을 포기하시고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죽으셨다. 그 온전하고 크나큰 사랑을 우리가 분명코 받았다. 그런데 왜 어째서 우리의 상처는 치유(회복)가 덜 되어 있는가.? 자, 이러한데도 사랑을 받아야 치유된다고 생각하고 말하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사랑)에서 빗나간 타락한 인간의 상처는 결코 사랑을 받을 때 치유(회복)되지 않는다. 오직 인간의 근본인 예수의 사랑을 온전히 행하고 이룰 때만이 치유 된다. 또한 이것이 그 형상의 회복이며, 예수께서 주신 계명의 의미이다) 예수님의 저 온전한 사랑을 받았는데 치유(회복)가 덜 되어 있다는 말에 반론을 펼 이들이 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한가지 질문부터 하겠다. "너는 사랑 받아야 할 존재다"..라는 말과, "너는 사랑해야 할 존재다"..라는 말 중에, 어느쪽이 당신과 나의 가치를 더 크게 올려주는 것인가.? 주는 자인가.? 받는 자인가.? 결코 사람의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엄성은.. 받는 것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사랑 받아야 사랑할 줄 안다.? 그런데, 대체 예수의 사랑을 그렇게 많이도 받은 우리는 모두 왜 사랑할 줄 모르는가.? 아직도 그 사랑이 부족한가.? 그래서 치유(회복이)가 덜 되서 사랑하지 않는가.? 사도바울이 말한, 우리 모두가 채워야 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뜻을 생각하자. 예수님은.. 나와 당신을 향해,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 말하지 않으셨다. 분명코 내가 너희를 사랑했기에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라 하셨다. 왜?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바로 예수(하나님) 자신과 같은 본질과 높이의 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쪽이 더 존귀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사랑을 주는 존재인가.? 사랑을 받기만 하는 존제인가.? 다시 또 반복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인간인 자기를 위한 내 사랑이 아니며, 내가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예수가 내 속에 계셔서 내게 사랑하게 하시도록 나를 비워야 가능한 사랑이다. 사랑하라. 아니, 사랑하게 하시는 예수의 사랑앞에 순종하라. 그러면 사랑한만큼 비워질 것이며, 비워진만큼 더 온전하고 큰 사랑을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