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은, 말 그대로 누군가를 높이며 칭찬하는 행위가 곧 찬양이다.
그 높임과 칭찬이 아니라면, 모두 企歌요, 答歌요, 慰勞歌요, 祝歌일 뿐이다.
찬양은 개인의 감정이나 경험이 아니다.
대상의 존재됨 자체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행위이다.
우리는 수많은 찬양이리는 이름에 노래들을 듣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노래들 중에 하나님과 예수님 자체만을 높이고 칭찬해 드리는 노래가 몇프로나 될까.?
우리의 노래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이루워 주셔야 우리 노래의 이유로 삼으려 한다.
이건 엄격히 찬양이 아니라 답가이다..
이 부분은 아주 깊이 생각해야 될 부분이라 이 글로는 부족할 것 같다.
하지만, 단적인 부분만을 봐도 문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는게 사실이다.
그 노래들의 가사를 보면, 마치 인간이 주술적 되뇌임으로 하나님을 조정하고, 이용물로 전락시키는 의도가 파악되기에,
이런 노래들은 불교, 힌두교, 회교 등 우상숭배자들의 기복적 되뇌임이나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엄밀히 따지면,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하나님이 주시는게 아니다.
예수님이 내가 무엇을 먼저 하나님께 해드려서 이 땅에 오셨는가.? 예수의 약속은 타락한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그 분이 날 사랑하는게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똑바로 보질 않고 있다는 증거다.
사도요한과 사도바울의 말을 보자..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롬 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타락의 속성인 자애를 소유하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을 내 힘과 능력으로 사랑할 수 없다.
인간의 사랑은 자기를 위한 의도와 저의가 깔려 있기에 그것으론 진심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며,
진짜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분이 주시는 모든것들은 우리가 그 분에게 무엇인가를 해드려서 주시는게 아니다. 여호와이레다.
이미 모든것을 예비해놓고 계시지만, 우리가.. 그리고 각 개인이 그것을 누리고 나눌 수 있는 상태가 될때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 모든것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만들어 놓으신 것들이다.. 이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해서 얻어내는 댓가가 아니다..
갓난아이에게 금덩이를 준들 그 가치를 알겠는가.?
하나님을 내가 사랑하는게 아니다. 내가 믿는것도 아니다. 그것마저 부인해야 한다 이 말이다.
예수가 내 믿음이 되시고, 그 믿음으로 내 의가 되시고, 내 사랑이 되셔야 한다. 바로 그것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다.
왜.? 예수님께는 자기를 위한 자애(自愛)가 없기 때문이다.. 그 분이 내가 되시게 하려면 나는 부인되어 가난한자가 되야한다.
이것이 성경적 하나님 사랑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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